[사막의 영성] 정욕으로부터의 자유

입력 2014-01-11 01:34

만약 우리가 자신의 마음 안으로 들어간다면 무엇을 보게 될까? 아마 우리 마음이 여러 종류의 정욕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정욕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과 후천적으로 길들여진 것이 있는데 모두 다 습관으로 고착된다. 보고 듣는 것, 느끼고 생각하는 것, 말하고 행하는 것이 반복되면서 습관이 되고 이는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인격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

사막 수도사들은 이러한 정욕을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 세 가지 관점을 가졌다. 첫째, 정욕을 마귀가 주는 악으로 규정한 것이다. 원로 피티리온은 “만약 누가 귀신들을 쫓아내기를 원한다면 정욕들을 정복해야만 한다. 그럴 때 정욕 뒤의 귀신이 제압된다. 예를 들면 마귀가 분노를 동반할 때, 만약 너희가 분노를 절제한다면 분노의 마귀가 사라진다.”

정욕과의 싸움은 마귀와의 싸움이었다. 정욕에 지는 것은 마귀에게 지는 것이었다. 다음 일화도 같은 관점을 보여준다. 한 수도사가 원로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의 생각이 한시도 저를 놓아주지 않는 정욕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원로는 이렇게 말했다. “마귀가 너에게 그런 생각이 나게 할 때마다 그 생각들과 싸우려 하지 마라. 왜냐하면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마귀의 활동이며, 그러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생각들을 추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각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너의 생각을 지켜라. 또 그것들이 네게 무엇인가를 말하기 시작할 때마다 그것에 대꾸하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 꿇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라.”

두 번째 관점은 정욕을 선이나 악이 아닌 중립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정욕은 좋은 방향으로, 혹은 나쁘게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은 정욕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어느 정도 그것을 허락하는가에 달린 문제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막의 수도사들은 정욕의 뿌리는 뽑아버릴 수는 없지만 저항할 수는 있다고 보았다.

원로 파네피시스의 요셉은 “만약 정욕이 네게 들어오면 싸워 이겨야 하며 그로 인해 너는 강한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유익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자들은 정욕이 들어오자마자 즉시 잘라버려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욕을 단번에 없애는 것과 시간을 두고 싸워가며 지배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한 사막에 유명한 은수자가 살았는데 한 창녀가 자신이 그를 유혹할 수 있다며 내기를 걸었다. 그녀는 길을 잃은 것처럼 가장하고 눈물로 호소하여 수도사의 방에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여인의 유혹은 시작됐고 은수자의 정욕은 불같이 타올랐다. 하지만 이내 은수자는 일어나 등불을 켰고 “이런 행위를 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 내가 영원한 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고 하면서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등잔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을 때는 그의 손가락은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창녀는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셋째, 스케테 사막의 원로 이삭에 따르면 분노 시기 호색 등 모든 정욕은 특별하고 신성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잘못 방향을 잡고 올바르지 않게 사용하기 때문에 정욕은 악하다고 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분노의 원래 목적은 세상 안에 있는 불의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시기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성인들의 덕에 필적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 우리들이 가진 욕구의 본래 목적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힘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로 이웃에게 화를 내고, 물질적인 것으로 이웃을 시기하고 땅의 일들을 갈망한다.”

참고 절제함으로써 덕을 소유

원로 조시마스 또한 정욕에 대해 “하나님은 선하시니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유익을 얻길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잘못 사용한다. 선물을 주실 때 우리는 악을 택하고 우리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바꿔버린다”고 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수도사들은 정욕을 짓밟고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더 크고 고귀한 욕망에 의해 정복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즉, 정욕이 가진 갈망과 애착의 강한 힘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 사랑으로, 순결과 거룩으로 전용할 수 있는 좋은 통로로 여겼다. 다시 말해 정욕을 참고 절제하면 덕을 소유하며 경건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믿었다.

사막 교부들이 공통으로 발견한 것은 정욕에 관한 한 우리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정욕에 빠질 때 정욕은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고 우리는 그 종이 된다. 빠져버리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 그러므로 빠지지 않기 위한 방법을 사막이 주는 교훈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김진하<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