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칼럼]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입력 2014-01-11 01:33


3·1운동 이후 일본 식민 제국통치는 한 단계 차원을 높여 식민 억압통치를 벌여 갔다. 그 이전까지의 헌병통치에서 문화통치라는 미명 아래 교활한 조선말살 우민통치를 시작했다. 심지어 창씨개명에 신사참배까지 강요하면서 황국신민화까지 실천에 옮겼다. 본래 역사적으로 극단주의 정책이 시행되고 그 여파가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을 보면, 그것이 한 시대의 종말을 일깨우는 징조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좌우를 막론하고 극단주의가 한 사회나 한 시대의 주류를 이루면 그것은 그 사회나 시대의 종언을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오랜 동서양 역사에 나오는 모두의 교훈이다.

문화란 이름 아래 교활한 억압통치에 몸으로 저항하는 모습도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저항의 표시로 정든 땅, 고향 친척을 떠나 낯선 지역에 외롭지만 새로운 미래의 둥지를 트는 이주민 행렬이 증폭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이미 식민탄압을 피해 만주 북간도 지역으로 이주를 떠난 우리 백성들의 숫자가 30만명이 넘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며 아쉬운 가슴을 부여안고 부르던 노래의 한 구절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누가 이 노래를 언제부터 만들고 불렀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래도 이 노래는 지금도 불러지는 일종의 ‘애민가’이다.

당시 조선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집단적 눈물을 자아낸 최초의 영화가 있었다.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그것이고, 그 주제가 역시 ‘아리랑’이었다. 지금 불려지는 서울경기 아리랑 혹은 신아리랑의 원조라고 전해진다.

사람에게 ‘알’이 있고, 알을 담은 ‘내장의 뒤틀림’이 아리랑의 모습이라고 한다. 눈물고개며 보릿고개가 아리랑 고개이며, 아프다 못해 ‘찌르듯 아프고 쓰라린 분노’가 ‘쓰리랑 고개’라고 한단다. 그러면서도 아픔을 넘어 기다리며 사모하는 ‘나의 사랑하는 낭군’이 ‘아랑’이요, 그를 노래하는 ‘아리랑’이 정말로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조선시대 말의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목사의 뜻 깊은 해석도 있다. 그는 고종을 도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이준 열사의 통역관으로 역할을 해낸 분이다.

오늘 이 땅에도 아리랑이 노래로만 남아 있는 게 아니다. 넘어야 할 아리랑 고개가 너무도 많다. 여야의 정치현장이 그 하나이다. 주권재민이 아니라 정당이기주의가 판을 친다. 국민을 선거용 유권자로만 보는 것 같다. 정강정책이라 내세우는 간판들이 뜻 없이 울리는 꽹과리처럼 들린다. 정부는 소통하라고 주문하니까, 민의 다른 외침을 불평이라 폄하하며 나홀로의 원칙만 노래한다. 무역흑자는 계속 상승하는데 사회적 약자의 빈곤화와 좌절은 나락으로 치닫는다. 양극화의 현실이다. 양심과 영혼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기독교는 ‘교회는 있으나 그 속에 복음이 실종된’ 중세교회를 보는 종교개혁 운동의 비판이 요즈음 이 땅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 이런저런 오늘의 심각한 아리랑 고개들을 어찌할까. 그 앞에서 좌절하며 불러야 할 ‘걸림돌’로서의 아리랑 고개일까, 아니면 힘들더라도 힘을 모아 뛰어넘어 새로움을 창출할 ‘디딤돌’로서의 아리랑 고개일까를 놓고 결단해야 한다.

구한말의 주변 위기상황과 지금의 한반도 상황을 비교하며 위기대처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당대와 비교하면 중국 일본 러시아가 편차는 있지만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고래들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그 시절과 다른 게 있다면 우리 한반도가 이제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는 아니란 것이다. 규모는 작으나 독한 ‘상어’ 정도는 될 것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다만 한반도 분단 때문에 남북의 내우와 주변국가와의 외환이 겹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에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디딤돌 삼아 새날을 개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과 북의 ‘통일대박’과 동북아가 함께 누리는 ‘평화지대 대박’으로 가는 새로운 소통의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새 아리랑을 불러볼 때와 계기를 만들어 내야 할 시점이 바로 오늘이다.

(경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