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한·중우호 반갑지만은 않다
입력 2014-01-11 01:34
2014년 한국은 늪을 지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1609년 광해군 집권 이듬해 1월 초의 국제정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동북아 균형이 무너진 것은 중국이 주요 2개국(G2) 대열에 들어서면서다. 세계질서 재편에 나선 중국은 방공식별구역(CADIZ) 선포로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 나섰다. 이 선포가 우리에겐 간단치 않다. 이어도를 포함하는 CADIZ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무시 전략으로 나온다.
우리보다 더 놀란 미국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로 진출하려는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환태평야경제동반자협정(TPP)을 통해 ‘우방을 챙기겠다’고 한다. 곤혹스러운 건 한국이다. 예전처럼 무턱대고 미국편에 가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중국은 되레 우리에게 일본의 역사 왜곡에 공동 대응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결기 세우면야 뒤도 안 가리고 그러해야 하지만 집단적 자위권 운운하며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또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미·중만큼이나 강력한 상대다.
박근혜정부 들어서 한·미·일 안보협력의 틀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박근혜정부 지지기반이 보수층이고, 그러나보니 일본과 북한에 대해 타협의 여지가 없다. 친중, 반일 정서가 박근혜정부 1년 차에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1609년 임금 광해는 일본 막부와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국교를 재개했다. 그때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다. 임진왜란으로 인구 절반이 감소했고, 경작지는 3분의 1이 줄었다. 기근과 전염병도 창궐했다. 국가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무조건 전쟁을 피하자’였다. 따라서 그는 국제 역학관계에 주목했다. 만주에서 여진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반면 대중화(大中華) 명나라가 쇠퇴한다는 걸 알아챘다. 여진은 후금이 되고 끝내 명나라를 무너뜨린 뒤 청나라가 된다.
일본은 그 무렵 네덜란드와 영국 상선이 드나들면서 남해로 뻗어나갔다. 필리핀, 베트남 등에 일본인 마을이 있었을 정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명과 조선에 국교 재개를 요청한 것도 해외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여진은 1616년 후금을 세웠다. 명은 이태 뒤 후금을 치겠다고 조선에 군사를 요청했다. 조선은 마지못해 강홍립을 도원수로 한 1만여명의 병사를 보내나 슬그머니 빠지는, 이른바 명·청 등거리외교를 했다.
광해군은 명, 후금, 일본 막부를 상대로 줄타기 외교를 하며 균형을 잡아간다. 광해군 때 집권 세력인 북인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던 사림들, 즉 영남 사림의 거두 조식 선생 계보였다.
그러나 사대 보수 세력인 서인은 여전히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숭명배금으로 똘똘 뭉쳐 끝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다. 그리고 명 숭배의 소(小)중화를 외치다 병자호란의 수모를 당한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에게 지정학상 주어진 구조적 숙명이다. 특히 중국은 5000년 역사 이래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우리가 그들을 깔보고 산 것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20년 정도다.
2014년 우리의 외교정책은 지나친 한·중 우호다. 미국을 섭섭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깔려 있다. 중국이라는 ‘주먹’은 가깝다. 당장 동북공정은 북한 붕괴를 겨냥한 것이다. 반면 미국은 멀다. 그만큼 중국보단 직접적 이해가 떨어진다는 얘기다. 중국 기세에 놀란 일본은 미국을 대리하려 든다.
전정희 디지털뉴스센터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