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 돌풍 일으킨 ‘변호인’ 양우석 감독 “生·분노·증오에 관한 영화 아냐”
입력 2014-01-10 01:37
영화 ‘변호인’의 돌풍은 이미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됐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졌지만 대중은 자신의 정치 성향과는 무관하게 이 작품에서 큰 감동과 위로를 받는 분위기다. 지난달 18일 개봉한 ‘변호인’의 관객 수는 이미 800만명을 넘어섰다. 영화는 다음 달 미국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캐나다 토론토 등 북미 지역 11개 도시에서도 개봉된다.
9일 서울 종로구 북촌로 한 카페에서 ‘변호인’을 연출한 양우석(45) 감독을 만났다. 그는 웹툰 스토리 작가, 영화 제작자 등을 거쳐 늦은 나이에 ‘변호인’으로 감독 데뷔전을 치렀다. 만약 ‘변호인’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한다면 그는 데뷔작으로 1000만명을 동원한 최초의 감독이 된다.
양 감독은 “영화가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지금 상황이 얼떨떨하다”면서도 시종일관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인터뷰에 응했다.
-데뷔작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변호인’은 웹툰을 염두에 두고 쓴 이야기였다. 영화는 대중적인 파워가 센 장르인 만큼 (정치적으로 민감한) 노 전 대통령에 관한 작품이라면 앞으로 10년은 지나야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우연찮게 영화사(위더스필름)에서 ‘변호인’ 스토리를 듣고 영화화를 제안했다. 처음엔 독립영화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송강호(47) 선배가 출연 의사를 밝히면서 덩치가 큰 상업영화로 발전하게 됐다. 감독 도전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한 번 결정하면 뒤를 돌아보는 스타일이 아니다.”
-‘변호인’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노 전 대통령이 5공 청문회(1988)에서 권력 맨 위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호통 치던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 분은 처음엔 돈이 전부였던 변호사였지만 세상의 부조리를 확인하고 인권에 눈을 뜬 사람이다. 누구나 며칠이나 몇 주는 분노할 수 있다. 하지만 몇 년간 계속 분노하긴 힘들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왔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결론은 반성과 성찰이었다. 영화를 통해 이 점을 알리고 싶었다. ‘변호인’은 분노와 증오에 관한 작품이 아니다.”
-영화의 어떤 부분이 대중에게 어필했다고 보나.
“그 분(노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황지우 시인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작품이다. 시에는 이런 시구가 나온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가 (법정에서) “이건 아니잖아요”라며 분노하는 건 여기서 착안한 대사다. 이런 대사에서 느낄 수 있는, 극중 인물의 모습이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던 것 같다.”
-‘변호인’을 둘러싼 각계각층의 관람 후기가 이어지고 있다.
“(관람 후기를 적은) 많은 글들이 내겐 감동이었다. 영화를 만들 때보다 오히려 요즘 들어 더 많이 ‘변호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끔씩은 이 작품이 정말 살아있는 생물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시나리오가 알아서 제작자를 구해주고 배급사를 찾아다닌 느낌이다. 개봉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작품 홍보마저도 영화가 스스로 알아서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노 전 대통령의 이야기는 영화로 다루기엔 예민한 소재다. 연출하면서 염두에 둔 부분이 있다면.
“특별하게 주의한 부분은 없었다. 내겐 이걸 영화로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갖는 게 중요했다. 이런 생각을 예전부터 많이 했다. ‘왜 이 분(노 전 대통령)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엇갈릴까.’ 결론은 순진함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분이 순진했기에 좋아했고, 경멸하는 사람은 이 분의 순진함이 싫었던 거다. 관객 중엔 ‘변호인’의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떤 부분이 꾸며낸 이야기인지 궁금해 하는 분이 많다. 난 1%의 허구라도 섞였다면 전체가 허구라고 여기는 사람이며, ‘변호인’ 역시 허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분의 실존적 고민만큼은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노 전 대통령 외에도 다뤄보고 싶은 인물이 있나.
“정말 많은데, 한 명만 꼽자면 고(故) 김수영 시인이다. 우리 사회의 1950∼6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지 않나. 하지만 심오하게 다뤄야 할 부분이 많아 이 분의 생을 어떻게 접근해야할까 고민하면 막막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일단 다음 작품에선 가벼운 이야기를 다룰 생각이다. 그게 영화가 될지, 웹툰이나 애니메이션이 될진 모르겠지만.”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