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버린 벼루에서 발견하는 선비정신… 이근배 시집 ‘추사를 훔치다’

입력 2014-01-10 01:37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이근배(74) 시인의 시 정신은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충남 당진 태생인 그는 조부로부터 율곡의 ‘격몽요결’을 배웠고 독립운동가인 부친에게서는 선비 정신과 애국정신을 물려받았다. 말하자면 전통적 가치의 계승자라고 할 그가 시집 ‘추사를 훔치다’(문학수첩)를 냈다. 그의 선비정신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벼루’를 통해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추사의 벼루를 보았다/ 댓잎인가 고사리인가/ 화석무늬가 들어 있는/ 어른 손바닥만 한 남포 오석/ (중략)/ 추사가 먹을 갈아 시문을 짓고/ 행예(行隸)를 쓰던 유품이 아니라면/ 한 눈에 들어올 것이 없는/ 그 돌덩이가 내 눈을 얼리고/ 내 숨을 멎게 한다”(‘추사를 훔치다’ 부분)

이 시를 비롯한 ‘벼루 읽기’ 연작은 그가 문방(文房)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실감케 한다. 이때 문방은 우리 정신사를 꿰뚫은 큰 선비들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에게서는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듯/ 펄펄 끓는 넋이 보입니다”(‘정몽주’)라며 그 뜨거운 넋을 보고, 사육신의 성삼문에게서는 “내 살아서 임금을 못 섬겼으니/ 죽어서 허리 굽은 소나무가 되어/ 장릉(莊陵)의 비바람을 막으리라”(‘성삼문’)라며 충절을 배운다. 또 면암 최익현에게서는 “부끄럽고 부끄럽다/ 다만 내 여윈 뼈를 바쳐/ 한 자루 척화의 도끼가 되리라”(‘최익현’)라는 비장한 결의를 발견한다.

그는 요즘도 한지 봉투에 붓글씨로 쓴 편지를 담아 부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시집을 누군가에게 보낼 때도 ‘청람(淸覽)’이라고 쓰고 낙관을 세 개나 찍어 보내기도 한다. 이처럼 묵향이 진하게 밴 그의 시집은 추사의 닳아버린 벼루 냄새가 풍기는데, 이는 먹을 가느라 닳아버린 바닥으로 선비정신을 드러내는 벼루의 본질처럼, 소멸하는 세계를 간직하겠다는 그의 시심과 맞물려 있다. “눈멀고 귀먹은/ 돌이라 살자 해도// 티끌 목숨 끝에/ 매달리는 헛된 생각// 풋 열매 익히지 못하고/ 이슬로나 지는 것”(‘적멸’ 부분)에서도 드러나듯 그 시심은 소멸에의 의지를 보여준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