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일상의 유배를 떠나다

입력 2014-01-10 01:34


“31일에 너 뭐 할 거냐? 나랑 음악회 가자!” 당연히 장단을 맞춰줄 줄 알았던 친구가 혼자 부산에 간다고 했다. 친구가 낯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더 그답게 만들고 존재감을 단단히 해주는 매력적인 거리감이었다. 연말에 혼자 웬 청승이냐 핀잔을 주었지만 그가 사람들의 들썩거림에서 스스로를 ‘유배시켜’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던 이가 누구인지 알 것도 같다.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다닐 수 있었던 열세 살 무렵부터 시도 때도 없이 고독을 씹고 싶었던 이십 대 후반까지, 진주 외할머니댁은 나에게 가장 좋은 유배지였다. 고속터미널에 내리면 근처 문구점을 방문해 비장한 마음으로 새 노트 몇 권과 색색의 펜을 사는 것이 ‘고독한’ 시간을 준비하는 의식이었다.

사실 시골에서의 일상은 반복 자체라, 고독을 씹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일찌감치 일어나 밥 먹고 치우고 동네 한 바퀴 돌고 또 먹고, 자고. 고독이 영혼을 감싸오기 전에 토실토실 살부터 올랐다.

그래도 밤이면 밤새 불경을 외우시는 할머니 옆에 누워 찔끔찔끔 책을 읽었다. 그 작은 방에서 이문구를 만나고, 마르케스를 읽었고, 신경숙을 흠모했다. 새 노트엔 그런 달뜬 감상과, 가슴 치는 글귀들, 미래에 대한 결심, 그리고 시도 산문도 아닌 기묘한 습작을 적어갔다. 마음이 동할 땐 한 장씩 찢는 시골 달력에 편지를 써서 그리운 이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당시 비싼 시외 통화료 때문에 친구들과의 전화 통화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서울과의 단절, 관계와의 단절, 지난 나와의 단절을 철저히 누릴 수 있던 시간…. 다시 서울로 들어올 때면 내 몸과 마음엔 전에 없던 찰기와 윤기가 흘렀다. 케임브리지대학 장하석 석좌교수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개성이 살아나기 위해선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며 스스로 일상의 유배, 자발적 유배가 필요하다.” 개성을 내가 나답게 숨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런 일상의 유배야말로 가장 절실한 숨구멍인지 모르겠다.

누구나 어느 순간 무리의 흥성거림을 뒤로한 채 홀로 자신의 공간에 앉아야 한다. 그 유배지가 자연에 벗한 곳이라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분위기 좋은 조용한 카페라도 괜찮겠다. 기왕 ‘큰 맘’ 먹고 떠난 유배이니, 나 지금 어디에서 뭘 먹고 있다며 SNS에 광고도 하지 말자. 그 전적인 여백이 내가 가장 먼저 만나야 할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줄 것이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만들어줄 것이다.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