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된 시각으로 인간의 미스터리 관찰… 2013년 노벨문학상 작가 앨리스 먼로 소설집 ‘런어웨이’
입력 2014-01-10 02:32
하나의 작품 안에 인간의 삶 전체를 압축시켜 재현해온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앨리스 먼로(83)의 소설집 ‘런어웨이’(웅진문학임프린트 곰)는 현실의 의외성은 아주 사소한 순간에 불거져 나와 누군가의 일평생을 좌우할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표제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칠 법한, 제각기 나름의 상처나 사연을 지닌, 그러면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승마레슨농장을 운영하는 남편 클라크의 정서적 학대에 찌들어 늘 도피를 꿈꾸는 칼라의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은 농장에서 키우던 염소 플로러의 실종이 작품 전체를 이끈다. “칼라는 고개를 들고 가까스로 목젖을 울려가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몇 번이고 휘파람을 불었다가 이름을 불렀다가를 반복해보았다. 플로러는 대답이 없었다.”(28쪽)
사라진 염소를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이웃집 할머니 실비아에게 들른 칼라는 갑자기 눈물을 쏟고 만다. 그 순간, 칼라의 상태를 눈치 챈 실비아는 묻는다. “염소 때문이 아니죠. 그렇죠?” 칼라는 대답한다.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툭하면 이웃들에게 시비를 걸어 폭력을 행사하거나 잠자리에서는 사랑도 없이 자신의 몸만 탐하는 호색한 남편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칼라는 어쩌면 사라진 염소가 부러웠을 것이다. 결국 칼라는 실비아의 도움으로 토론토행 버스에 올라 마을을 벗어난다. “칼라는 마을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창문에는 선팅이 되어 있어 어차피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칼라는 혹시라도 눈에 띌까 싶어 조심했다. 특히 클라크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자기를 버리려 한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평소와 다름없는 오후라 여기며 가게에서 나오는 중이거나 길을 건너려고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클라크.”(50쪽)
먼로는 이 지점에서 놀라운 반전을 펼쳐 보인다. 클라크가 실비아의 집을 찾아가 칼라의 행방을 캐묻는 장면이 그것. “물론 놀라셨겠지. 집사람이 도망치는 걸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줬으니 말이야.” “떠날 때는 아주 행복해 보였어요. 당신 아내 이전에 한 인간이라고요.” “우리 집사람이 인간이야? 정말로? 알려줘서 고맙군.” 두 사람이 문전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하얀 물체가 지나간다. “당신의 염소군요. 맞죠?” “플로러, 너 도대체 어디 처박혀 있다가 나타난 거냐?”
플로러의 귀환은 공교롭게도 토론토행 버스에서 내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칼라의 귀환과 맞물리고 소설의 결말은 실비아가 칼라에게 보낸 편지로 끝맺는다. “플로러가 돌아온 일은 우리 인간사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플로러가 등장함으로써 당신 남편과 나한테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답니다. 적대감으로 무장하고서 대치 중이었던 두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허깨비를 보고서 넋이 나간 거예요. (중략) 그러니 플로러는 내 인생에 나타난 착한 천사인 셈이죠. 아마 당신 남편과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 믿어요.”(71쪽)
먼로는 인간의 미스터리를 절제된 시각으로 관찰하면서 서스펜스마저 느끼게 만든다. 스릴 넘치는 현실의 의외성을 부각시켜 우리가 숨쉬는 대기 자체를 긴장시키는 게 먼로의 힘일 것이다. 이밖에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남자와 사랑에 빠진 줄리엣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세 개의 단편 ‘우연’ ‘머지않아’ ‘침묵’은 하나의 연작으로 연결되어 장편의 맛을 느끼게 한다. 먼로는 어쩌면 인간의 영혼에 대해 종합적으로 묘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간 감정의 연산에 대한 먼로의 직감은 고스란히 독자들의 축복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