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도영] 街人 김병로의 청빈
입력 2014-01-10 01:34
미군정 사법부장(현재의 법무부 장관) 시절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다. 화장지 대신 신문지를 손바닥보다 작게 잘라 화장실에 꿰어 놓았다. 담배 한 개비를 두 토막으로 잘라 피웠다. “내가 기름을 때면 다른 법원장 관사에도 기름을 때야 한다”며 톱밥이나 연탄을 땠다. 손잡이가 부러진 도장을 대법원장 도장으로 10여년 사용했다.
대법관에게 승용차를 주자는 건의에 “법관이란 집에서 법원에나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것인데, 차는 해서 무엇 하느냐”고 답했다. 정부가 법원청사 확장이나 신축에 대비해 법원 주변 국유재산 수천 평을 법원으로 넘기겠다고 제안하자 “범죄가 줄어들고 소송이 적어야 좋은 세상이지, 청사만 늘려 무엇 하겠는가”라며 거절했다.
백미는 퇴임사다. “나는 전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이 영광이라고 그랬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명예롭기 때문이다.” 비리를 저지를 바에야 차라리 굶어 죽으라는 독설이었다.
김학준의 ‘가인 김병로 평전’에 등장하는 김병로(1888∼1964) 선생의 일화다. 오는 13일은 가인이 세상을 떠난 지 50주기 되는 날이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외벽에는 지난 8일 10여m 길이의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나라의 큰 별, 살아 있는 정의,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가인은 우리나라 판사들이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가인이며, 김용철 9대 대법원장은 1986년 취임식에서 김병로 선생의 뒤를 따르겠다고 했다.
가인이 존경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인은 일제 강점기 신간회 활동을 주도했고, 안창호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호했다. 해방 후 9년3개월간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며 사법부의 초석을 닦았고, 이승만 대통령과 불화하며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럼에도 기자의 눈은 자꾸 괴팍하다 싶을 정도로 청빈하고, 가혹하다 싶을 만큼 절제했던 가인의 청빈함에 쏠린다. 일제시대와 모든 것이 부족했던 해방 이후의 삶을 현재와 비교할 수는 없다. 현직 법조인들에게 가인의 삶을 따라가라고 권하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일하던 김능환 전 대법관에 환호했던 국민들의 기대감, 이후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생업을 잃으면 착한 마음도 없어진다)’는 맹자의 말을 남기고 로펌에 들어간 그에게 쏟아졌던 아쉬움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고위 법관 재산신고액 꼴찌, 퇴임 후 변호사 개업과 로펌 영입 제안을 뿌리치고 모교 석좌교수로 돌아간 조무제 전 대법관도 국민들에게 깊은 울림이 됐다.
많은 고위 법관들이 옷을 벗은 뒤 한 해에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을 받고 변호사로 활동한다. 직업 선택의 자유다. 우리 사회는 풍요로워졌고, 법률 수요도 늘었다. 그래도 아쉽다. 아직은 몇 명의 조무제와 대법관 출신 편의점 직원이 필요한 시대인 듯해서다.
가인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진 1932년 변호사업을 접고 낙향했다. 서울 집과 가산을 처리하고 빚을 갚으니 총 재산이 600원, 쌀 100가마 살 돈이 남았다. 10년 동안 변호사 생활 끝에 남은 재산이었다. 밀렸던 송사 비용 2000원을 받아 2600원을 마련한 가인은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밭 3000평을 사들여 해방이 될 때까지 가족들과 농사를 짓고 돼지와 닭을 키우며 살았다. 가인이 요즘 전관 변호사들의 연봉을 보면 입이 쩍 벌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남도영 사회부 차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