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학도병으로 6·25 참전해 전사한 남편… 63년 지나 ‘전몰자 유족’ 인정받은 아내

입력 2014-01-10 01:31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3개월 뒤인 9월 재일교포 학생으로 구성된 재일 학도의용군 642명이 조국을 지키겠다며 현해탄을 건넜다. 당시 일본 나고야에 거주하던 고(故) 박대벽씨도 그중 한명이었다. 아내 강선림씨와 가정을 꾸린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꽃다운 아내는 당시 22세였고 박씨도 29세로 젊었다. 만 4세 첫딸과 생후 3개월 된 둘째 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을 모른체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후배들도 학도의용군에 지원했다. 그렇게 조국으로 떠나 같은 달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박씨는 전사하고 말았다.

남편의 전사 소식도 모른 채 일본에 남은 아내 강씨는 이제나저제나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의 친구로부터 “시신을 보진 못했지만 죽은 것 같다”는 편지를 받았지만 정식 전사통지는 받지 못했다. 그게 강씨의 ‘희망 끈’이었다.

강씨는 9일 일본에서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사통지를 받지 못한 만큼 남편이 혹시 북한에 포로로 잡혀갔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믿음에 기대 남의 집 가정부 일부터 의복 수선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며 딸 둘을 키웠다”고 말했다.

생계 때문에 고군분투하느라 강씨는 자신이 전몰자 유족에 대한 연금 수혜 대상이 되는지 알지 못했다. 정부가 국가유공자와 유족을 찾아내 보상하는 게 상식이지만 한국 정부의 행정력이 국외 거주자인 강씨에게까지 미치지 못한 탓이 컸다.

강씨는 지난해 6월 뒤늦게 전몰자 유족으로 인정됐다. 주일 한국대사관 주최로 열린 6·25 63주년 기념식에서 감사장 수여 대상자로 재일학도병 유족을 찾던 중 전몰자의 배우자 가운데 유일하게 강씨가 생존해 있는 것을 확인한 덕분이었다. 그동안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한 사실도 알게 된 주일대사관은 절차적 지원에 나섰고, 국가보훈처가 수기 기록을 통해 전몰자 유족 인정에 필요한 사실관계 확인을 마쳐 강씨는 지난달에야 연금수령 대상자로 등록됐다. 63년 만의 너무도 늦은 결정이었다.

올해 85세인 강씨는 여생 동안 매달 131만2000원의 연금을 받게 되지만 소급 적용은 안 된다. 최근 암 수술까지 받아 병든 몸으로 혼자 생활하는 강씨는 “앞으로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한국 정부로부터 남편과 가족의 희생에 대해 인정받은 점은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연금을 요양시설을 이용하는 데 사용할까 한다”고 덧붙였다.

백민정 기자 min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