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美서 팽 당한 냉전 희생양 본국서 일내다

입력 2014-01-10 01:37


중국 로켓의 아버지 천쉐썬/아이리스 장/역사인

‘중국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과학자 천쉐썬(錢學森)의 일대기다.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중국인 유학생이 하루아침에 미국의 냉전 히스테리의 희생양이 되어 추방당한 뒤 중국으로 돌아가 로켓과 인공위성 개발에 앞장서며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은 극적인 삶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1911년 천쉐썬은 중국 항저우에서 하급 교육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명석했던 그는 3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입학했다가 학풍에 적응하지 못하자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으로 자리를 옮겼고, 유명한 항공공학자 시어도어 폰 카르만을 만나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인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 미국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를 다룰 수 있는 허가를 받아 기밀 연구에 참여했다. 47년 30대에 MIT 정교수로 승진하고, 2년 뒤 칼텍에서 석좌교수로 임명되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동양인의 전설이 됐다.

하지만 50년 미국에 매카시즘이라는 광풍이 덮치면서 그의 삶도 하루아침에 달라진다. 여느 중국 출신의 인사들처럼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사실이 아니라며 반발했고, 상처받은 자존심에 미국에서 정착하려던 꿈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당초 이를 막던 미국 정부는 얼마 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추방 명령을 내린다. 동료 과학자들과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추방을 피하고자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55년, 그는 중국행 ‘프레지던트 클리블랜드’호에 오른다. 그의 변호인은 “미국 정부가 공산 중국이 이용하도록 천재 과학자를 내쳐버린 것은 세기적인 비극 중 하나”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몇몇이 우려했던 사태는 그 이후 벌어졌다. 그가 중국으로 돌아간 직후부터, 미국에 한참 뒤처져있던 중국의 전략 미사일 개발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실력 있는 교수였지만 그는 중국에서 미사일과 우주개발 프로그램의 건설자로서 더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66년 10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사막에서 중국이 핵탄두 장착 발사에 성공하면서 그의 유명세는 더했다. 뉴욕타임스는 “공산 중국에서 최초의 핵미사일 개발을 떠맡은 사람을 미국이 5년간 가르쳤고 격려해서 표창하고 일자리까지 마련해주면서 신뢰했다는 사실은 냉전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시대와 불화한 그의 삶은 중국에서도 계속됐다. 내성적이고 혼자 연구하기를 좋아하던 과학자 천쉐썬은 결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정치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가 1958년 ‘과학대중’에 기고한, ‘물, 거름, 노동력만 확보하면 수확량을 20배로 늘릴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은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근거로 작용했다. 대약진운동이 무수한 아사자를 낳으며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후 이 사건은 그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두고두고 빌미를 제공했다.

이후 정치적으로 굴곡진 삶을 살다 2009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자서전은 물론이고 전기 출간도 거부했다. 미국을 다시 찾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서방 언론과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속내를 보여준 적도 없어 냉전이라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그가 매 순간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나마 중국계 미국인 여성작가 아이리스 장이 광범위한 문헌 조사와 그의 아들, 주변 지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 이 저작이 천쉐썬의 삶을 가장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록으로 남게 됐다. 국내서는 ‘난징대학살’로 번역 출간된 ‘난징의 강간’을 통해 난징대학살을 미국에서 이슈화시켰던 장이 이에 앞서 썼던 첫 저서다. 탄탄한 자료를 토대로 천쉐썬의 일생과 고비마다의 심경을 추적하는 저자의 속도감 있는 서술 스타일은 아이러니 그 자체인 천쉐썬의 삶을 더욱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이정훈 옮김.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