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죽음 마주한 노학자의 남겨진 삶들을 위한 위안

입력 2014-01-10 01:37


아흔 즈음에/김열규/휴머니스트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팔순을 넘기다보니,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지경에 빠져들곤 한다. 삶의 여백에 죽치고 있다는 생각을 떨어내기 쉽지 않다. (중략) 여생이란 그 말, 나머지 인생이란 그 말이 역겨워서 떨어내자고 해도 그게 쉽지 않다. 지겹도록 머릿속에 눌어붙어 있다.”(‘여생이란 말 떨어내고 싶은데도’)

지난해 세상을 떠난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 교수의 유고 에세이집이다. 그는 우리 민속과 문화를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읽어내며 ‘한국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학자다. 30여 년간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을 지키다 퇴임 뒤 고향 경남 고성으로 내려갔다. 이후 22년간 고향의 품에서 사색하고 글을 쓰며 우리 시대 본받을만한 어른으로 남았다. 2001년 내놓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를 통해 죽음을 사회적 화두로 제시했던 그는 끝까지 삶과 죽음이란 주제를 놓지 않았다.

지난해 봄 집필하기 시작해 초여름 완성한 초고를 손질해 묶었다. 그는 갑작스레 혈액암 판정을 받고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늦가을 세상을 떠났다. 나이 든다는 것에서부터 죽음에 대한 단상, 평생 매달렸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 인간들 사이의 정(情)에 이르기까지 여든 넘게 살아온 삶을 반추하며 남긴 기록은 맑고 영롱하다. 생전에 나이 들수록, 죽음이 다가올수록 삶은 선명해야 한다고 했던 그의 말 그대로다.

그는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 모든 기운을 쏟아 쓴 이 책이 “나이 든 사람들 누구나의 인생살이에 유종의 미를 꽃피우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뿐만 아니라 한창 젊은이들에게는 유종의 미가 마련되도록 그들 삶이 가꾸어지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누구보다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노년을, 죽음을 마주한 노학자의 목소리는 위안이 되고 또 격려가 된다.

김나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