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입력 2014-01-10 01:38
“공평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상식이 의심받을 때 법과 원칙은 생명력을 잃는다”
사상 최장의 철도파업이 정부의 승리로 마무리된 이후 가장 자주 듣고, 접하는 말이 ‘법과 원칙’이다. 이런 추세라면 올 최대 유행어로 등극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포털 사이트에 관련어를 검색해보면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법과 원칙을 얘기하고 있다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의료서비스 활성화 논란 등 사회적 대립과 이견이 있는 현안마다 “법과 원칙에 따라 대처하겠다”는 내용들이다. ‘법과 원칙’으로 철도파업을 끝낸 박근혜 대통령을 롤 모델로 삼으려는 듯 그 기세가 자못 등등하다.
법과 원칙대로 한다는데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불법행동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른 대응이 필수적이다. 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비정상의 정상화’ 또한 법과 원칙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다. 이 같은 상식이 의심받을 때 법과 원칙은 생명력을 잃는다. 어느 사안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을 원칙이라고 정의한다면 박 대통령이 말하는 원칙은 뭘 의미하는지 감을 잡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사안에 따라 쓰는 자(尺)가 달라서 그렇지 않을까. 박 대통령은 법인카드 유용 의혹을 받고 있던 인사를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관 자리에 앉혔다. 그 의혹이 사실이라면 공기업에 대한 개혁은 원칙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부실 인사와 소통의 부재는 박근혜정부의 아킬레스건이다. 박 대통령이 이 두 가지를 이명박정부의 최대 실책으로 꼽은 건 참으로 아이러니다.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 대선후보 선출을 앞둔 2012년 8월 “이명박정부에 대한 불신은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회전문 인사 등 인사 문제에서 시작됐다. 불행히도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소통이 안 됐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을 향한 화살이 지금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되돌아올 거라고 당시에 상상이나 했을까.
새누리당은 대선 공약인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백지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표를 얻으려고 공약은 했지만 막상 선거가 다가오니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어진 듯하다. 공천제가 폐지되면 국회의원들이 지역정치를 장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 사라진다. 토호의 발호 등 일부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방정치의 중앙정치 예속화를 막으려면 공천제를 폐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서 지난 대선 때 새누리당도, 민주당도 앞 다퉈 공약으로 내걸었다.
박 대통령이 제시한 정치개혁 과제 가운데 하나가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다. 후보 시절이던 2012년 11월 박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단호한 어조로 “기초자치단체의 장과 의원의 정당 공천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이랬던 박 대통령이 대국민 약속을 파기하려는 새누리당의 움직임이 더욱 노골화되고 있는 이 순간, 남의 일마냥 침묵하고 있는 상황은 납득하기 어렵다. 소신을 바꾸지 않았다면 새누리당의 ‘역주행’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개헌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87년 체제’의 타협물인 대통령 5년 단임제를 바꿔야 한다는 데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비록 뱀 꼬리가 되고 말았으나 여야는 18대 국회에서의 개헌에 합의한 바 있다. 박 대통령도 대통령이 되기 전 “정책의 연속성이라든가 여러 가지를 생각할 때 4년 중임제가 바람직하다. 집권하면 4년 중임제와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 강화 등을 포함해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었다. 그러나 신년 기자회견에선 “개헌은 블랙홀”이라며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대통령 스스로 ‘87년 체제’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개헌 논의를 말자는 건 자기부정이다. 개헌을 아주 하지 말자는 것인지, 올해 개헌 얘기를 꺼내지 말자는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원칙을 버리면 영(令)이 제대로 서긴 어렵다. 참 지도자는 당장의 어려움보다 국가의 미래를 먼저 생각한다. 지도자에게 그 이상의 원칙은 없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