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신분 도용 (하)-타인의 삶을 훔친 ‘화차’] 전문가 진단 “획일적 가치만 인정이 원인”
입력 2014-01-09 02:13
‘인생 도둑’이 등장한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획일적인 가치만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를 꼽았다. 외모 학력 직업 등 누군가를 평가하는 잣대가 너무 단조로워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 행태도 이런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사람들에게 ‘나’를 공개하는 공간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보여주기’식 글이 경쟁적으로 쏟아지며 상대적 박탈감을 더욱 조장한다.
충남대 심리학과 전우영 교수는 8일 SNS판 ‘화차’ 사건과 관련해 “성공이라는 가치가 지나치게 협소해서 나타난 문제”라고 진단했다. 현재 한국에선 멋진 외모에 좋은 학교를 나와 모두가 인정하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만이 ‘성공’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K양도 따지고 보면 잘하는 게 있을 텐데 한국 사회가 인정하는 이상적 모델이 정해져 있어 거기에 맞추려고 남의 인생을 도용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 등을 통해 형성된 일방적 성공모델은 청소년기부터 개인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는다. 집에서, 학교에서, TV에서 끊임없이 주입된 가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 실망하고 극단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충족하고픈 욕구가 강해진다. 전 교수는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와 문화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이런 인생 도둑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건국대 의대 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좋은 얘기만 올라오는 SNS의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SNS 이용자들이 여행·음식·공연 사진 등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것만 올리는 경향이 강하다고 진단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클릭 등 남들의 반응이 늘어나고 부러워하는 댓글이 달리면 만족감을 얻는다. 반면 별로 자랑거리가 없는 이들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박탈감을 느끼고, 심하면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다. 하 교수는 “도용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열등감을 만회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사이버 에티켓 교육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양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박용천 교수는 “필명으로 글을 쓰거나 가면무도회가 유행하는 등 과거에도 자신을 감추는 문화가 꾸준히 존재했다”며 “이런 흐름이 IT 산업의 발전과 만나 ‘사이버 세상’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사이버 시대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의식, 자세, 사용법이 전혀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K양처럼 남의 삶을 도용해도 큰 잘못이 아니라고 느끼는 게 좋은 예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정부와 시민사회 차원의 지속적인 캠페인과 교육이 있어야 건강한 사이버 공간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