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M&A 시장에 수십조 매물… 재계 판도 지각변동 예고

입력 2014-01-09 02:50


인수·합병(M&A)은 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통로다. 뛰어난 기술력이나 성장 잠재력을 단숨에 사들일 수 있다.

최근 국내 M&A 시장에는 매물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장기 불황으로 STX·동양·현대·동부그룹 등이 구조조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금융 계열사는 물론 주력사업 분야까지 내다팔고 있다. 올 상반기에만 M&A 시장 규모가 수십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자칫하다간 ‘승자의 저주’(M&A 경쟁에서 이겼지만 과도한 비용으로 인수 후 후유증을 겪는 현상)에 빠질 수 있다. 글로벌 경제가 여전히 안갯속이라 선뜻 거액을 투자하기도 쉽지 않다. 팔려는 기업은 헐값에 내놓고, 사려는 기업은 망설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쌓이는 매물=동부그룹과 채권단은 이달 중 계열사 매각 작업을 수행할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한다. 동부그룹은 지난해 11월 동부하이텍, 동부메탈, 동부제철 인천공장 및 당진항만 등을 팔아 2015년까지 3조원가량을 확보한다는 자구책을 발표했다. 반도체 전문회사인 동부하이텍의 매각 대상 지분은 37%로 1000억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시장에서는 동부하이텍의 성장 가능성이 높아 조기 매각이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그룹은 현대증권, 현대자산운용, 현대저축은행 등 금융 계열사 3곳을 판다. 동양증권에 이어 이트레이드증권, 아이엠투자증권, 리딩투자증권, 애플투자증권 등 10여개 증권사가 매물로 나온 상태다.

동양그룹 구조조정으로 동양매직, 동양파워도 매수자를 찾고 있으며 쌍용건설, 남광토건, 동양건설산업, LIG건설 등도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LIG그룹은 기업어음(CP) 투자자 피해 보상액을 마련하려고 LIG손해보험 매각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 산업은행이 대주주인 대우조선해양과 정책금융공사가 대주주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도 M&A 시장에 다시 나올 수 있다.

◇제값 받을 수 있을까=알짜배기 매물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시장에는 찬바람만 분다. 오랜 경기 침체로 상당수 기업이 현금 여력이 없는 데다 올해 경영 환경을 위기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어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주요 그룹의 총수 부재도 M&A 시장 위축을 불러오는 이유다.

때문에 제값을 받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자산 매각이 차일피일 시간을 끌거나 제대로 된 가격을 받지 못하고 팔리면 해당 그룹은 물론 채권단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

이에 따라 사모펀드 시장을 활성화해 매물 기업을 소화하는 등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재계 관계자는 8일 “삼척화력발전소 사업권을 갖고 있는 동양파워의 경우 시장에서 평가하는 가치가 최근 5000억원 수준까지 떨어졌다”며 “각 기업의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해야 해당 그룹의 안정적 경영이 가능해지고, 시장도 활기를 띠는데 현재는 M&A 자체가 꽉 막힌 상황”이라고 말했다.

◇재계 판도도 급변=위기 기업이 늘면서 재계 판도도 변하고 있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대의 지각 변동이다. STX, 웅진, 동양 등 3개 그룹은 대기업집단 지정에서 탈락하거나 탈락 위기를 맞았고 한진, 동부, 현대도 올해 재계 순위가 2∼5단계씩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9위인 한진은 자산 매각이 이뤄질 경우 11위로 2계단 내려앉게 된다. 17위 동부도 자구 노력에 성공한다면 자산이 크게 줄어 20위로 떨어지고, 현대그룹은 21위에서 25위가 예상된다. 동양은 지난해 말 공정거래위원회의 상호출자제한 대상 지정에서 제외됐다.

10대 그룹 내에서도 STX에너지를 인수한 GS그룹이 현대중공업그룹을 뛰어넘어 7위와 8위의 순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 부동의 1위는 삼성그룹이고 현대자동차그룹, SK그룹, LG그룹, 롯데그룹, 포스코가 2∼6위에 랭크됐다.

반면 기업경영성과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2004∼2013년 10년간 공정위가 지정한 상호출자제한 대기업집단의 자산 순위를 조사한 결과 순위가 가장 가파르게 상승한 그룹은 부영과 한라였다. 부영은 2004년 36위에서 22위로 14계단 올라섰다. 2008년 대기업집단에 처음 진입한 한라도 53위에서 39위로 치솟아 상승률 공동 1위를 기록했다.

김찬희 기자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