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만호 (12) 보증금 부족에 “제 젊음 보고 점포 빌려주세요”

입력 2014-01-09 01:31


신학을 하지 않고 평신도 사역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함평중·고등학교 시절 함평중앙교회를 다니며 본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님의 부친 홍순호 장로님과 그 가정이 신앙적으로 매우 부러웠다. 나의 신앙생활 목표로 삼을 만큼 깊은 인상이 남아 있었다.

홍 장로님은 함평 자광원이라는 고아원을 운영하시면서도 정미소 제재소 목욕탕을 운영하셨다. 함평에서 가장 큰 상점을 사거리에 갖고 있었는데,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수천명이 홍 장로님의 사업장 중 어느 한 곳은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정도로 홍 장로님은 큰 사업가였다. 새벽기도와 주일 성수, 교회를 섬기는 모습 또한 모범적이어서 함평 지역사회에서 신앙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이런 경험은 신학대에 가는 것보다 평신도로서 사회와 교회에 봉사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나 직업과 선교를 향한 꿈은 사업자금에 가로막혀 있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사영리 첫머리 말처럼 하나님은 나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지만 사업자금은 낭떠러지 절벽처럼 느껴졌다.

1976년 2월 사람들이 설 준비로 바쁘던 날, 나는 일찍 일어나 기도를 하고 무작정 서점 점포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동대문에서부터 용산 후암동 입구까지 10여개 이상의 복덕방을 찾아다녔다. 복덕방도 설을 앞두고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나는 낙심치 않고 걸어서 남영동 어느 복덕방에 찾아갔다. “사정이 이런데 제 사정에 맞는 서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설을 쇠러 충청도 고향에 가기 위해 문을 닫기 직전에 오셨네요. 우리 복덕방 옆으로 한 집 건너에 북쪽을 향하는 10평쯤 되는 점포가 나와 있으니 설 지난 다음 다시 봅시다.” 그 말만 듣고 복덕방 주인은 고향으로 향하고 나는 봉천동행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점포는 남향보다 북향이 더 좋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함평 홍 장로님 상점도 북향이었다. 주위에 숙명여대, 신광여고, 수도여고, 용산고, 보성여고, 숭실고가 있어 서점 위치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을 쇠고 복덕방을 찾아갔다. 임대료와 입주일자를 알아보니 보증금도 적은 월세였다.

아무리 적은 보증금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진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가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주인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제 사정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가게 주인이 경찰 출신인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으니 가볼 필요도 없을 것 같소만.” 나는 즉시 노량진에 산다는 가게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게 임차 관계로 찾아뵙겠다고 했더니 오라고 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주인은 경찰 출신답게 깐깐해 보였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보증금이 부족하니 대신 월세를 올려주겠다고 했다. 주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 순간적으로 “나의 젊음을 보시고 점포를 임대해 주시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대신 다섯 돈짜리 결혼반지를 맡겨 놓고 3개월 동안 보증금 잔액을 마련해 반지를 찾아가겠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미소를 띠고 청년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며 금반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아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금반지를 점포 주인에게 가져갔다. 그렇게 다음날 복덕방에 가서 임대계약서를 썼다. 계약서 내용엔 ‘금반지 다섯 돈이 포함됨’이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복덕방 아저씨도 이런 계약은 처음 본다며 웃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