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신분 도용 (상)-타인의 삶을 훔친 ‘화차’] “연예인처럼 예뻐서 부러운 마음에 그냥 갖다 썼다”

입력 2014-01-08 02:37

인생을 훔친 여자

‘진실은 진실을 알아본다.’

7일 어렵게 찾은 K양(18)의 카카오톡 계정에는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상태 메시지’난에 이런 의미심장한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페이스북과 마찬가지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이지나(가명·24·여)씨의 것이었다. 그는 무엇이 ‘진실’이라고, 무엇이 ‘진짜 나’라고 믿고 있는 걸까.

K양은 기자의 카카오톡 대화 요청에 응했다. 페이스북에서 알게 된 남자친구에게는 ‘기획사 소속 배우 지망생’이라고 했었지만 기자에게는 자신을 “올해 고3이 되는 평범한 여고생”이라고 밝혔다. 페이스북에서 이씨 사진과 일상을 도용한 일을 묻자 짤막하게 “죄송하다”고 답했다.

왜 계속 이씨 사진을 퍼다 올렸냐는 질문에 K양은 “우연히 이씨의 페이스북을 보게 됐는데 이씨가 연예인처럼 예쁘기에 부러운 마음에 그냥 갖다 썼다”고 했다. 한 장 두 장 가져다 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이씨의 삶을 통째로 베끼게 됐다는 것이다. 별로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이씨는 지난달 2일 사진과 정보가 도용된 걸 안 뒤 페이스북 메시지 기능 등을 이용해 어렵게 K양과 연락이 닿았다. 이후 약 한 달 동안 수차례 K양에게 자신의 사진을 페이스북에서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마다 K양은 “곧 지우겠다”고만 하고 무시했다.

기자가 “도용·사칭은 범죄 아니냐”고 하자 그는 “몰랐다”고 짧게 답했다. “명예훼손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K양은 “이제부터 이씨 사진을 쓰지 않으면 아무 문제없는 거냐”고 되묻더니 그제야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에서 이씨의 사진을 지웠다.

전문가들은 “K양이 현실의 자신과 이상적 자신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사람의 정신세계에는 ‘이상적인 나’가 있고 ‘실제의 나’가 있는데 청소년기에는 이상적 나를 추구하는 경향이 극대화된다”며 “이상적 나와 실제 나의 차이가 너무 클 때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은 불안감과 우울증을 겪다 결국 이상적 나를 실제 나로 인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이씨를 동경해 이씨의 생활을 엿봐오던 K양이 동경심과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아예 이씨를 자신이라고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양대 정신건강의학과 박용천 교수는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열등감에 대한 보상책으로 타인의 칭찬과 환호를 갈구한다”고 말했다. K양은 이씨의 사진으로 온라인에서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예쁘다”는 말 듣는 걸 즐겼다.

그렇다면 K양은 왜 화려한 연예인이 아닌 평범한 이씨를 택했을까. 곽 교수는 “연예인은 각종 매체에서 자주 접해 익숙하니까 미지의 인물을 찾은 것”이라면서 “또 이씨는 일반인이라 도용 사실이 들통 날 염려도 적고 사람들의 의심도 피할 수 있으니 이상적 자아를 현실화시키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정부경 박세환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