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신분 도용 (상)-타인의 삶을 훔친 ‘화차’] “남의 공간에서 내가 살고 있다니…”

입력 2014-01-08 02:37


인생을 도용당한 여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일면부지(一面不知) 타인의 공간에서 또 다른 나를 마주했을 때, 경악을 넘어선 공포가 밀려왔다. 한 달 남짓 시간이 지났지만 이지나(가명·24·여)씨는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등줄기가 바짝 선다. 지난달 2일 새벽 이씨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익명의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저기요, 누가 당신 행세를 하고 다녀요.” 이씨는 그가 알려준 대로 K양(18)의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곧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사이버 공간에는 이씨 자신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범한 여자였다=남부러울 것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이씨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해 ‘예쁘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유학을 다녀와서 대기업에 다니며 커리어도 차곡차곡 쌓아나가던 중이었다.

이씨는 여느 또래처럼 SNS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저녁 먹은 근사한 레스토랑 사진을 올리고, 큰 맘 먹고 염색한 머리도 자랑했다. SNS에서 친구들과 수다도 떨었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해 좋을 것 없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 일상을 남들과 즐겁게 공유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적 의견을 밝히거나 위법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니 딱히 문제될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6개월간의 염탐과 도용=그날 밤, 이씨의 평탄한 인생은 틀어졌다. 이씨는 K양의 페이스북을 보고 한참 동안 굳어 있었다고 했다. K양이 페이스북 화면 첫머리에 걸어둔 프로필 사진부터 사진첩에 올린 모든 사진은 이씨의 것이었다.

K양은 치밀하고 집요했다. 이씨가 지난해 11월 30일 ‘불금(불타는 금요일)엔 운동이지!’라는 글과 함께 헬스장에서 운동복 입고 찍은 사진을 올리자 K양은 이 사진을 퍼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추가하며 똑같은 문구를 적었다. 곧 많은 남성이 ‘섹시하다’ ‘몸매가 좋다’는 댓글을 달았고 K양은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양 답글을 올렸다.

이씨가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면 빠르면 1시간 뒤, 대부분 이튿날에는 K양의 페이스북에 같은 사진과 같은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K양은 거의 온종일 이씨의 페이스북을 엿보고 있었던 셈이다. 단순히 이씨의 얼굴 사진만 훔쳐 쓴 게 아니었다. 이씨가 산 물건, 이씨의 생일파티, 이씨가 갔던 장소, 이씨가 먹은 음식 등 모든 생활이 K양의 일상으로 둔갑했다.

K양은 이씨의 사진과 일상을 내세워 온라인 친목 모임에 가입한 뒤 100여명과 교류하기도 했다. 남자친구도 만들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남성과 이른바 ‘사이버 연애’를 시작했다. 그 남성이 K양에 대해 알고 있던 외모, 취미, 습관, 좋아하는 영화, 자주 먹는 음식 등의 정보는 모두 이씨의 것이다. K양은 그에게 “나는 한혜진, 문근영, 지성 등 유명 배우들이 소속된 기획사 연습생이라 매우 바쁘다”며 실제 만남을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K양은 자그마치 6개월 동안 이런 식으로 이씨의 삶을 베껴 살았다.

◇경찰 “민사소송 하라”=이씨는 7일 “K양의 페이스북을 보다 보니 나중에는 누가 나고, 누가 K양인지 모를 정도로 극도의 혼란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씨는 K양이 6개월 동안 페이스북에서 활동한 내역을 일일이 기록해 ‘도용 일지’를 만들었다. 그는 “원본인 내 페이스북과 비교하니 너무 똑같아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이렇게 만든 증거 자료와 진정서를 들고 지난달 12일 서울 강남경찰서 사이버수사팀을 찾아 K양을 고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형사고소는 안 될 것 같으니 명예훼손으로 민사소송을 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페이스북 서버가 미국에 있어 국내 경찰의 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씨는 절망했다. 그는 “민사소송을 하자니 변호사도 찾아야 했고 소송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며 “사회 초년생인 내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소송을 포기했다. 현재 K양에 대한 모든 대응을 사실상 접은 상태다.

이씨는 “내가 받은 정신적 피해가 명백한데 왜 처벌이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나와 비슷한 피해자가 분명 더 있을 테고 앞으로는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