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김관호·김환기 高價 명화 들고 튄 ‘검은 손’ 화랑대표 4년 만에 잡혔다
입력 2014-01-08 02:37
평범한 회사원이던 A씨(56)는 2007년 우연히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에 강제 징용당한 한국인 희생자 유골이 세계 곳곳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이들을 고국으로 모셔오고 싶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미술문화교류협회 아세아총본부’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교수와 작가들이 1980년 국제적 친교회로 시작한 이 단체는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 반환과 전쟁 희생자 유골 봉환 사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미대를 졸업해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A씨에게 안성맞춤인 시민단체였다.
봉환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유골을 포장해 들여오고 다시 안치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후원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취지에 공감한 사업가나 명망가들이 후원했지만 빠듯했다. 없는 재정을 쪼개 2002년 5차례 유골 및 위패 946위를 봉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령탑 건립 및 추모공원 조성까지 추진하기엔 어려운 살림이었다.
그러다 기회가 찾아왔다. 2008년 초 A씨는 부모가 모두 독립 유공자인 홍모(55)씨를 만났다. 홍씨는 A씨에게 “유골 봉환 사업에 보태 쓰라”며 미술품 10점을 기부했다. 이 중에는 일제 시대 천재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김관호(1890∼1958) 화백의 ‘해금강’과 김환기(1913∼1974) 화백의 ‘달밤’도 포함돼 있었다. ‘해금강’은 김관호 화백이 직접 홍씨 부모에게 준 작품이었다. 두 작가는 유화·추상화의 대가였다.
그림을 팔아줄 전문가를 찾던 A씨는 2008년 8월 지인에게서 이모(56)씨를 소개받았다. 2002년부터 서울 강남에서 화랑을 운영하던 이씨는 업계에서 ‘큰손’으로 유명했다. A씨는 이씨에게 그림 10점과 함께 자신이 갖고 있던 다이아몬드와 루비 원석 등 보석 8점까지 팔아달라고 맡겼다. “좋은 일에 쓰려 하니 잘 부탁한다”고도 했다. 시가 33억8100만원어치였다.
“걱정 말라”던 이씨는 1년여 만에 연락이 끊겼다. 2009년 10월 운영하던 화랑을 닫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A씨가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후 4년여 동안 이씨는 ‘대포폰’을 쓰고 주기적으로 숙소를 바꿔 가며 경찰 추적을 피했다.
공익사업에 쓸 금품을 편취해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한 경찰은 서울 강남 일대 화랑을 일일이 탐문하고, 옛 거래처를 모두 점검하고, 4년 전 쓰던 전화번호까지 추적했다. 이씨는 결국 지난달 17일 서울 강남구 언주로 부근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사기 전과 15범인 그는 4년 내내 강남 주변을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도피 중에도 미술품 사기 행각을 벌였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이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하고 검찰에 송치했다고 7일 밝혔다. 이씨는 경찰에서 “그림 10점을 다 팔았다”고 진술했으나 어디에 팔았는지는 함구했다. 경찰은 그중 ‘해금강’과 ‘달밤’의 행방을 찾았다. ‘해금강’은 이씨에게 돈을 빌려줬던 한 변호사가 갖고 있었다.
업계 관계자는 “‘해금강’은 부르는 게 값일 만큼 예술성을 인정받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경찰이 감정을 의뢰해 방사성탄소연대 검사를 실시한 결과 두 작품은 모두 진품이었다. 경찰은 해금강 등 2점은 확보했지만 나머지 8점의 행방을 찾아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