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만호 (11) “이번엔 문서선교” 서울 후암동에 아가페 서적을

입력 2014-01-08 01:43


엑스플로 74대회 때 수십만명이 단시간에 상경한다는 것은 당시 철도 운송 규모로 봤을 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장시간 연구 끝에 자전거로 엑스플로 74대회를 상징하는 민족 복음화 깃발을 달고 대회 10일 전 그룹을 지어 올라오면서 전도도 하고 교회를 찾아 전도훈련을 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숙소는 교회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회 전날 서울로 입성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임 간사, 아주 좋은 아이디어요. 그렇게 하면 대회 홍보도 되고 전도훈련도 가능할 것이오.” 김준곤 목사님은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렇게 수천 명의 자전거 전도요원들이 수원공설운동장에 집결해 엑스플로 74대회 전야제를 가졌다. 이때 국내외 신문기자들은 이 광경을 대서특필했다.

오전 9시에 출근하면 밤 11시에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서울 정동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회관에서 버스로 밤 11시쯤 퇴근하면 늘 졸음이 몰려왔다. 상도동 숭실대 앞에서 내려야만 자정 전에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는데 버스 안에서 잠이 들어 상도동을 지나쳐 봉천동 종점까지 가버리는 일이 일상화됐다. 당시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 시간이 있어 봉천동 종점에 도착하면 밤 12시 5분 전, 상도동 집으로 고개를 넘어 뛰면 약 20분 정도 소요됐다. 그러면 늘 통행금지 위반으로 걸리곤 했다. “아니, 오늘도 늦게 오십니까.” “아,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번에도 좀 봐주세요.” “다음엔 늦지 마세요. 가세요.” 그렇게 늦는 일이 많다 보니 봉천동 파출소 순경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통과시켜 주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CCC에서 민족 복음화에 열정을 다했다.

많은 일 중에 엑스플로 74대회에 미력이나마 기여한 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엑스플로 74대회를 마치고 원주 지역 간사로 일하다 나의 일을 찾기 위해 CCC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젊음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힘썼던 민족 복음화는 후회 없는 보람된 삶이었다.

CCC를 떠나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여러 가지 구상을 했다. 간사를 퇴직할 때 퇴직금도 없을 뿐 아니라 CCC의 봉급으로는 저축할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민족 복음화를 위한 열정과 보람은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힘과 가치가 있었다. 후회 없는 일을 마무리하면서 아무 불만이나 걱정이 없었다.

기도하면서 직업 선택을 고민했다. 1976년 1월, 선교 방법은 CCC와 다르지만 선교적 사명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문서선교에 나서기로 했다. 출판사와 함께 서점을 동시에 개업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상도동 숭실대 앞 상도제일교회(예장 합동)였다. 담임 목사님은 백병건 목사님이셨다. 목사님이 어느 주일 오후에 나를 부르셨다. “임 집사는 내가 보기에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나 신앙생활 하는 면을 보니 총회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자가 되는 것이 좋아 보이네. 학비는 교회에서 부담할 테니 교회 전도사로 봉사하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감사합니다. 목사님. 그러나 인생의 값진 젊은 시절에 아낌없이 일했던 CCC의 정신대로 순수성을 갖고 평신도로서 민족 복음화 사역을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서선교사역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싶습니다.” 당시 주요 기독교 서적 출판사들은 직영서점(기독교문사, 생명의말씀사, 백합서점, 정음사)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도 규모는 작지만 도서출판 크리스챤서적 출판사와 서울 후암동 입구 도로변에 아가페 서적이라는 서점을 개업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