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공터
입력 2014-01-08 01:32
집으로 오는 길에 공터 하나가 있다. 원래 거기엔 봄이면 목련꽃이 피는 마당을 가진 허름한 집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이 언제부턴가 폐가(廢家) 비슷하게 되더니 아무도 안 사는지, 담에 이것저것 전단지들이 앉고, 군데군데 구멍도 뚫려 안이 거무튀튀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마저 허물어 앉아버리고 담도 어디로 가버렸는지 가끔 구멍 뚫린 시멘트 벽돌만이 나뒹굴었다.
그런데 그 공터를 지나갈 때면 언제부턴가 나는 한숨을 쉬며 그곳을 들여다보는 나를 발견하곤 하였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나는 거기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목소리가 목련꽃나무 뒤에서 달려 나오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목소리는 외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듯이 보이는 그 공터엔 실은 많은 것이 있다고. 어느 날 새벽의 소리는 물론 그런 아침 쓰윽 열리던 대문소리며, 작은 말소리, 어느 봄날 하얗게 일어서던 목련꽃잎들, 잎사귀가 큰 후박나무, 거기 잎사귀에 앉았던 구름소리, 바람소리…. 공터는 여러 소리들과 장면으로 순간 가득 찼다.
얼마 전 어느 동네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도 공터가 많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따뜻하게 쏟아지는 겨울 햇빛은 공터를 더욱 다정하게 했다. 공터로부터 시작되는 언덕길, 군데군데 공터는 더구나 그 공터에 배추라도 자라고 있으면 그 햇살 가득 품은 마당은 마치 겨울의 자궁과 같았다. 생명이 자라나는 땅의 자궁. 그뿐 아니라 조금 빈틈이 있어야 모든 구(球)는 완전해지듯 공터는 그 동네를 완전하게 하는 임무마저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우리 동네의 그 공터를 지날 때마다 ‘아’ 하는 한숨이 튀어나오는 것은 잡풀 사이로 고개를 내민 예쁜 들꽃에 대한 감탄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집들이 빽빽이 들어찬 동네의 빈틈인 그 공터에 잠시 힐링되는 듯한 그런 감 때문이리라.
그렇다. 마음의 공터들을 갖자. 그 마음자리에 넘치는 다정한 햇빛이며 진초록의 풀들, 목련꽃도 피게 하자. 약간 빈 몸은 다정하게 이 땅을 받아들이리라. 함부로 화를 내지 않으리라. 그 마음자락으로 세상을 덥히리라. 이웃 사람들을 배려하리라. 길거리를 가다가 누군가와 어깨만 스쳐도 ‘미안합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리라. 오늘도 공터를 지나간다. 마음자리 길을 걸어간다. 햇빛 쏟아지는 봄을 향하여.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