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정승훈] 대자보

입력 2014-01-06 01:43

바야흐로 대자보 열풍이다. 학생회나 특정 조직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던 대자보가 대학생 개인은 물론 고등학생, 대학 내 청소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의사를 표현하는 매체로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작은 목소리에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언론들도 대자보가 붙었다는 소식만 들리면 대서특필하고 있다. 대자보가 어떤 것보다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 된 셈이다.

1930년대 초 당시 소련에서 정치선전용으로 활용됐던 벽보의 영향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대자보는 중국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파생된 것으로 전해진다. 권력을 장악한 실권파가 주요 간행물까지 통제하자 조반파가 이에 대항해 자신들의 의사를 알리기 위해 각 대학 등에 써 붙인 데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대자보가 보는 이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의사표현의 마지막 수단이라는 상징과 관련 있다. 내용이 왜곡되지 않은 ‘날것의 의견’으로 인식되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주요 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내용이 자신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대자보 열풍의 근저에 깔려 있는 셈이다.

사기의 ‘주본기(周本紀)’ 편에는 ‘방민지구심우방천(防民之口甚于防川)’이란 고사성어가 나온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어렵다는 뜻이다. 백성에게 자기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폭정을 일삼았던 서주의 려왕(?王)은 무당을 동원해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색출했다. 백성들이 이에 눌려 아무 소리도 못하자 려왕은 자신을 욕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다며 태평성대라고 했다. 신하 소목공이 “냇물을 위하는 자는 물이 잘 흐르도록 물길을 터주고, 백성을 위하는 자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려왕은 듣지 않고 공포정치를 계속했다. 결국 백성들의 민란으로 려왕은 왕위에서 쫓겨났다.

언로(言路)를 통제하고,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자 하는 유혹은 포악한 군주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조직이 있는 곳에선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한 대학이 청소노동자들의 대자보에 대해 벌금을 물리도록 하는 ‘간접 강제신청’을 법원에 제출한 일이나 최근 정부의 언론 대응을 보면 걱정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무릇 높이 올라갈수록 많이 말하는 것보다 많이 듣는 게 옳지 않나 싶다. 물론 사람들의 얘기를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건 언론의 몫이다.

정승훈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