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만호 (9) “CCC 회원 1만명 먹일 밥솥 100개 구해주소서”
입력 2014-01-06 01:28
1971년 제야의 종소리에 맞춰 서울대 농대 수원캠퍼스에서 민족 복음화 제1차 집회가 열렸다. 김준곤 목사님과 30여명의 간사, 대학을 졸업한 나사렛 형제들이 민족 복음화를 선언했다. 나는 71년 대전 1만명 민족복음화운동 요원 강습회와 73년 춘천성시화대회, 74년 엑스플로 74 대회의 CCC 총무부장으로 책임을 맡았다.
70년대 당시 CCC는 서울 묵정동 대학생 봉사회 강당을 빌려 집회를 갖고 있었다. 정부로부터 서울 정동 구 러시아 공관 자리 500여평 부지를 불하받아 꿈에도 그리던 20층짜리 회관과 별관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CCC 재정을 담당했으며 정동회관 신축 담당 간사로서 무거운 짐을 져야 했다.
CCC는 71년 8월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민족복음화운동 요원 강습회를 가졌다. 3박4일 동안 복음전도 정예 요원을 훈련시킨 것이다. 그때부터 민족복음화운동이라는 대단원의 훈련이 시작됐다.
나는 정혜숙 간사와 대회의 재정, 취사를 맡았다. 1만명의 밥과 반찬을 준비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100개가 넘는 밥솥을 구하는 게 문제였다. 전국 CCC 17개 지구에 수소문해 봤지만 집회 1주일 전까지 겨우 7개밖에 못 구했다. 응급처치로 대전 지역 군부대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자대원들의 용도에 맞게 시설을 갖췄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취사장 부지까지 마련해 놓고 솥을 구하지 못해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다렸다. 솥이 없다보니 동분서주했다. 취사장에서 일하는 30여명 간사들은 목재소에서 땔감으로 쓸 마른 피죽을 구해다 현장에 쌓아놓기만 했다. 다들 간절한 마음으로 ‘밥솥은 어디 있습니까’하며 무릎 꿇고 기도했다. 그때 진공열이라는 청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간사님, 다른 준비는 다 됐는데 솥이 없으니 어떡합니까. 제가 알기로는 저쪽 너머에 중국 사람이 하는 솥 공장이 하나 있긴 한데요.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단 몇 개라도 솥을 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취사장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10분을 걸어 솥 공장에 도착했다. 소규모 공장이었는데 양은솥에 밀려 파산 직전의 상태처럼 보였다.
“솥을 파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사정을 들은 중국인 사장은 창고 한 귀퉁이로 우리를 안내했다. 창고 안에 들어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곳에는 솥 100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10년 전 만들어 놓은 것인데 아직까지 팔리지 않아 이렇게 먼지만 쌓이고 있습니다.”
전율이 느껴졌다. ‘하나님은 민족복음화대회를 위해 10년 전부터 솥을 준비해 두셨다! 민족 복음화는 반드시 이뤄진다.’ 순간 하나님의 계획과 민족 복음화의 확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1972년 국제CCC 본부 주최로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코튼볼 미식축구장에서 엑스플로 72 대회가 열렸다. 주 강사는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였다. 엑스플로 74 대회 준비를 위한 견학차 나도 참가했다. 7만명이 운집한 집회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복음 전도를 위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다양한 얼굴과 옷을 차려있고 모였다. 수만명이 함께 찬송하는 소리는 마치 천군천사가 함께 부르는 소리 같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음성 같기도 했다. 엑스플로 72 대회는 상상을 초월하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