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에 부는 女風] ‘여성 최초 타이틀’ 승진자 4인 인터뷰 “후배들 길잡이 되고 싶어”
입력 2014-01-04 03:12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길을 걸을 때 함부로 밟지 마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임을 명심하라’는 서산대사의 시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에 첫발을 내딛는 것은 긴장되고 떨리는 일이다. 그만큼의 책임감도 따른다.
지난해 말 인사에서 ‘여성 최초’의 타이틀을 달고 승진한 신한은행 신순철(53) 부행장보, 외환은행 최동숙(53) 전무, 하나은행 김덕자(54) 전무, 농협은행 문갑석(53) 부장 등을 만났다. 막 출발선에 선 이들은 기쁨보다는 부담감을 토로했다. 또 한결같이 더 열심히 해 후배들의 앞길을 터주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산 넘어 산…유리천장, 워킹맘의 고충=여고시절 은행원을 꿈꿨던 네 사람은 꿈을 이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버티는 게 더 힘들었다. 함께 들어왔던 여자 동기 중 다수가 결혼과 육아 문제로 고민하다 회사를 그만뒀다. 200여명이었던 여자 동기는 25년이 지나 10명 남짓으로 줄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소위 말하는 ‘유리천장’에 부딪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 만난 신 부행장보는 “입사 당시만 해도 여성 직원은 결혼하면 금방 그만둘 것이란 인식이 있어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업무는 잘 맡기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매번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시켜 달라고 한 덕분에 다행히 여신이나 당좌 업무 등 다양한 업무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영업점에서 근무할 땐 전자금융 담당 부서로 가기 위해 세 번이나 도전장을 내기도 했다.
일터에선 누구보다 똑 부러지고 당당한 이들이지만 아이들 앞에선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최 전무는 “둘째가 어렸을 때 급식당번에 한 번도 가주지 못했는데 그때 원망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환한 미소로 답하던 최 전무의 얼굴에 순간 슬픈 기색이 스쳤다.
출산휴가가 60일에서 2년으로 늘어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는 등 근무환경이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하지만 육아는 여전히 전쟁이다. 이들은 “30년 전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었는데 요즘 후배들도 크게 다르지 않더라”며 육아시설 확충 등 사회적 인프라 마련이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았다.
◇가장 큰 힘은 가족=그래도 힘이 된 건 가족이었다. 가장 감사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이들은 모두 아이를 돌봐주신 친정어머니, 바쁜 아내를 이해하고 적극 후원해준 남편, 엄마의 손길 없이도 바르게 자라준 아이들을 꼽았다.
문 부장은 “합천지점은 집에서 70㎞나 떨어져 있었다. 일 때문에 술을 마셔 운전을 못 할 상황이 되면 남편이 미리 버스를 타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수 운전해 데리고 가기도 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바쁜 엄마를 이해하며 일찍 철이 들어버린 두 딸에겐 애틋함을 드러냈다. 그는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할 때도 일하는 엄마가 신경쓸까봐 말하지 않았던 아이들이 고마우면서도 짠하다”고 덧붙였다.
밖에서 편히 일할 수 있도록 아이를 돌봐준 엄마에 대한 감사한 마음도 전했다. 최 전무는 “친정 엄마가 편찮으시면서도 아이들 봐줄 테니 일하라고 배려해주셨다”며 덕분에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성의 강점 살려 발전에 기여=최근 여성 약진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혹자는 여성 대통령 시대의 ‘구색 맞추기’라고 폄하하지만 ‘여자는 못 할 것’이란 편견을 걷어낸 결과란 의견도 있다. 또 금융권의 새로운 조류에 여성 특유의 감성과 섬세함이 적극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번 인사에서 하나은행 금융소비자본부장 자리에 오른 김 전무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금융소비자 보호가 강조되고 있는데 고객과의 소통이 중요한 부서인 만큼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금융권에서 여성 등용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권 금융소비자 담당 임원은 대부분 여성이 맡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자이익 감소로 기존의 예대마진에 의존하던 수익 구조에서 종합자산관리 등 비이자 수익을 늘리는 추세 속에도 여성이 활약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자산관리나 펀드와 방카슈랑스 판매 등은 고객과 개별적 관계를 유지하고 상품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유치할 수 있는 분야다.
최 전무는 “영업에서 적극적인 마케팅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보니 소통을 통해 신뢰를 쌓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더 중요하다”며 “남자가 못 한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여성이 감성적으로 소통하는 데 강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신 부행장보는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능력’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으로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또 “갑자기 여성들이 대거 고위직에 오르면서 우려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며 “여성들이 능력을 발휘해 우리 사회가 좀 더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졌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글=박은애 기자 limitless@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