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에 부는 女風] 차별에 밀리고… 육아에 막혀도… 유리천장 뚫고 ‘하이킥’
입력 2014-01-04 01:38
최초의 여성 은행장인 권선주 기업은행장이 입행했던 1978년. 일부 시중은행은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여행원에게 받았다. 여성은 대리 시험을 칠 자격이 없다는 은행 내규도 있었다. 여행원이라는 말 자체도 당시엔 성차별의 상징이었다. 일반직으로 채용하던 남성들과는 달리 여성은 여행원으로 분리 채용돼 승진과 임금에서 차별받았다.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장(여성금융인네트워크 회장)은 2일 “좋은 직장으로 꼽혔던 은행에 취업했던 친구들이 결혼퇴직각서를 썼다는 얘기를 듣고 고민 끝에 남녀 차별이 없는 외국계 은행에 취업했다”고 회고했다.
상업은행, 한일은행 여행원들이 앞장서서 폐지 운동을 벌인 끝에 결혼퇴직각서제는 78년 이후 은행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여성을 보는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심부름은 으레 여행원 몫이었고, “임신한 여성이 어떻게 사무실을 걸어다닐 수 있느냐”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농협 최초로 여성 본부 부서장이 된 문갑석 NH농협은행 부장(80년 입행)은 “육아휴직이 당시 60일이었지만 눈치가 보여 한 달 이상 가는 게 힘들었다”고 전했다.
대졸 여성이라도 행원으로 뽑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행원 전환고사 등이 도입된 곳도 있었지만 여성에겐 제대로 된 일을 주지 않는다는 불만은 누적돼 갔다.
신한은행 첫 여성 임원인 신순철 부행장보(79년 입행)는 “여성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업무 영역이 좁다는 것이었다”며 “대부분 여성 행원들은 텔러(창구전담 직원)로 시작해 텔러로 끝났다”고 말했다.
이후 금융권에선 동일노동 동일임금 운동이 전개됐고, 결혼퇴직각서제가 없어진 지 15년 만인 93년 결국 여행원제가 폐지됐다. 또 행원과 여행원으로 분리됐던 호봉 체계를 단일 체계로 바꾸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사무직 여성운동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여행원제 폐지 이후 여성 은행원은 여신, 당좌, 외환 등으로 업무 영역을 넓혀갔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잇따라 지점장을 배출하면서 의미 있는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2013년 최초의 여성 대통령 등장은 금융권에 여풍을 몰고 왔다. 연말 은행 인사에선 ‘금녀의 영역’으로 남성들이 독식해 왔던 금융권 고위직에 여성의 진출이 이어졌다. 하이라이트는 사상 최초 여성 은행장 탄생이었다. “유리천장이 깨진 게 아니라 하늘이 뻥 뚫린 것 같다”고 김 원장이 감회를 표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코드를 맞추려고 해도 임원 대상자를 찾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전히 금융권엔 여성 인재풀은 넓지 않다. 여성금융인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시중은행 본부장급 이상이 30명 정도에 그치고 있는 상황이다. 외국계 금융 최고경영자(CEO)들이 “한국 여성은 일을 너무 잘하는데 나중에 보면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일도 잦다.
주요 부서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지 못하는 게 한계라는 지적도 있다. 김 원장은 “여성 은행원의 80%는 지점에서 개인 소매금융 업무를 하고 있다”며 “리스크 관리, 기업금융, 투자은행, 외환은 거의 맡기지 않다보니 조직에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요 보직을 순환 근무해야 관리자로 성장하는 파이프라인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한장희 박은애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