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최전선 낙도 선교船이 누빈다

입력 2014-01-03 19:58 수정 2014-01-03 10:49


2014년 새해를 이틀 앞둔 지난달 30일 오전 8시. 전남 여수시 소호동 소호항 앞바다. 잔잔한 호수 같던 바다 위를 배 한 척이 갈랐다. 길이 10m, 무게 8t짜리 크루즈요트형 선박은 동남쪽 바다를 향해 쏜살같이 치고 나갔다. 갑판 아랫부분을 코발트블루로 칠한 배에는 ‘신바람낙도선교회’라고 쓴 흰색 글자가 선명했다. 쌍발 스크루를 풀가동하자 속도계는 21.4노트(kn)를 가리켰다.

대다수 섬 주민인 노인을 돌보다

첫 방문지는 소두라도. 항구에서는 20㎞ 떨어진 곳이다. 전체 6가구가 사는 섬으로 선교회는 20여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할아버지 한 명을 찾아 나섰다. 선교회는 생필품을 준비했고 할아버지를 위해 강아지 한 마리도 배에 태웠다. 12월 들어 다섯 번째 출항이었다.

이날 방문하는 섬은 모두 4곳. 선교회 봉사자 10명은 이른 아침부터 200㎏에 육박하는 생필품을 배에 실었다. 생필품은 선수(船首)쪽 갑판 아래에 쌓았다. 원래는 거실과 침실 용도로 설계된 공간이었지만 선교회는 낙도 주민과 교회에 전달할 20여 가지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이용했다. 자동차로 말하면 트렁크인 셈이었다. 트렁크엔 물을 비롯해 쌀과 김치, 라면, 두부, 돼지고기, 영양제, 치약·칫솔, 각종 과일 등이 즐비했다.

바다 위를 달린 지 50분이 지나자 소두라도 서북쪽에 도착했다. 집은 여러 채 있었지만 모두 빈집이었다. 살던 주민들은 섬을 떠나거나 사망했다고 한다. 야트막한 언덕 위를 올라 대숲을 지나자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이 나타났다. 도로명 주소는 ‘소두라길 75.’ 행정구역상 여수시 남면이다.

방에 있던 김인조(79)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선교회 대표 반봉혁(61) 장로가 김 할아버지를 와락 안으며 “약은 잘 챙겨 드셨제?”하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그려, 훨씬 들 아퍼졌어”라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9년 전 신바람낙도선교회를 통해 예수를 영접했다. 선교회는 관절염을 앓고 있는 그에게 관절염약을 제공해 왔다. 또 등주교회와 협력해 김 할아버지 집을 수리하기도 했다. 파란색 지붕의 양쪽 처마 끝이 햇빛에 반사되며 반짝였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낙도선교선은 다시 수항도를 향했다. 수항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동편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곽후방(86) 할머니가 유일한 거주자다. 10년 전 신바람낙도선교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인 할머니는 한 달에 두 번씩 자신을 찾는 선교회 봉사자들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할머니는 기자에게 “이 사람들 없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여.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항상 와” 하며 손을 꼭 잡았다.

90도로 허리가 꺾인 곽 할머니는 물이 나오지 않는 섬에서 빗물로 생활했다. 우물도 마른 지 오래여서 5년 전부터는 빗물까지 마셔야 했다. 그러다 받아놓은 빗물통에 벌레가 우글거리는 것을 본 반 장로가 할머니를 위해 생수를 배에 실었다. 웃음 전도사였던 고(故) 황수관 박사는 할머니의 집 수리를 위해 자금을 지원하고 봉사에도 참여했다. 곽 할머니는 세 번째 섬을 향해 떠나는 선교회 봉사자들을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선착장까지 나왔고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선교선 키를 잡은 김용태(50) 목사는 “10년간 꾸준히 찾은 덕분에 이제는 섬 주민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며 “여수 일대 섬 85%가 복음화됐다”고 말했다. 그는 전남 순천시 왕지감리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다 낙도선교에 전념하기 위해 2년 전 담임직을 내려놨다. 그는 “배에 물이 들어와 침몰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고 접안하던 중 너울성 파도에 배가 요동쳐 봉사자 일부가 바다로 추락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그래도 선교선은 간다”고 말했다. 선교선은 출항 시 항상 예배부터 드린다. 또 구호를 외치며 결의를 다진다. ‘예수님을 위해 죽으러 갑시다! 낙도 어르신을 섬기러 갑시다!’ 이날 봉사자들도 이 구호를 외쳤다. 나무 십자가 목걸이 하나씩을 걸고서.

영적 도전에 직면한 섬 목회자를 위로

2003년 출범한 신바람낙도선교회는 여수 일대 16개 섬을 찾으며 복음과 사랑을 전하고 있다. 물이나 전기가 없고 젊은이도 없고 교회도 없는 ‘삼무도(三無島)’만 찾아 2주에 한 번씩 어김없이 배에 생필품을 싣고 순회했다. 그동안 참여한 봉사자만 2000명이 넘었고 미국과 캐나다, 중국, 필리핀 등에서도 봉사자들이 찾았다. 6년 전부터는 섬 교회 목회자를 찾아 위로하고 있다. 여수시 일대 도서는 워낙 열악한 곳이 많아 교회가 있어도 교인은 10명 안팎이었고 어촌 특성상 샤머니즘 숭배 전통이 남아 있어 목회자들에겐 격오지나 다름없다.

이날 찾은 조발도 역시 그랬다. 조발교회 김재용(51) 목사는 봉사자들을 보자 울먹였다. 그는 “반주기가 없어 육지의 70여개 교회에 후원을 요청했지만 아무 연락이 없던 차에 선교회가 도움을 줬다”며 “추위와 배고픔, 교회에 대한 주민 반감으로 우울증까지 앓아야 했다”고 말했다.

조발도는 육지와 가까웠지만 해류가 빠르고 날씨 변화가 심해 찾는 이가 적었다. 그만큼 폐쇄적이어서 마을 제사의 하나인 당산제가 남아 있고 사람이 죽어도 매장하지 않고 사체를 외부에 노출시켜 방치하는 ‘풍장(風葬)’이 존재한다. 자연히 교회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아 얼마 전에는 주민 한 명이 김 목사를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이런 섬을 선교회 봉사자들은 꾸준히 찾았고 김 목사는 생필품을 받는 족족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지금은 교인 한 명이 출석한다.

앞서 찾은 송여자도는 지난해 10월 말 새 예배당이 완공돼 등대처럼 섬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빈 농가를 수리해 예배당으로 쓰던 송여자생명교회(원순희 목사)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신바람낙도선교회가 서울 해오름교회(최낙중 목사)에 사정을 전했고 이를 교회가 수용하면서 1억6300만원을 들여 예배당을 건축했다. 교단을 초월해 예장 백석 소속 교회가 예장 통합 측 교회를 도운 것이다.

여수시 일대에는 무인도를 포함해 275개 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대부분 유인도에 전기가 들어가지만 냉장고가 없어 음식 보관이 어렵고 우물이 끊긴 곳이 많아 깨끗한 식수가 필요한 실정이다. 반봉혁 장로는 “냉장고가 없는 노인들을 위해 통조림이 많이 필요하다”며 “교회와 성도들의 도움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서해의 방주호, 복음 전선 이상 없다

비행기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교통은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수상교통은 육지와 육지를 연결하는 강과 하천, 바다를 항해하는 이동수단으로 예부터 중요시됐다. 선교 역사에서도 배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었다. 저명한 미국의 선교학자 랄프 윈터 박사는 근대 선교를 세 시대로 구분하고 첫 시대(1792∼1910)를 ‘해안선 선교시대’로 지칭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윌리엄 케리가 배를 타고 이동하며 복음 전파에 나섰고 이를 유럽 교회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배를 이용한 선교 릴레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 역시 배는 요긴한 선교 수단이다.

지난달 29일 찾은 충남 보령시 오천면 육도교회 역시 해안 선교의 바통을 잇고 있었다. 이 교회 담임 유선우(32) 전도사는 인근 소도에 살고 있는 최정자(65·여) 성도를 태우러 가기 위해 ‘방주호’ 시동을 걸었다. 배에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약간의 절차가 필요했다. 청바지에 방한복,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나타난 유 전도사는 뭍에서 30m 정도 떨어진 바다에 정박해 놓은 배에 오르기 위해 일명 ‘흐이’라 불리는 사방 1m짜리 스티로폼에 올랐다. 흐이에 앉은 그는 방주호와 연결된 밧줄을 잡아당겼다. 조금씩 배와 가까워졌지만 위태로워 보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차디찬 바다에 빠질 수 있었다. 유 전도사는 수영을 못한다고 했다. 한 번도 빠진 적은 없다며 장담했지만 바람 부는 바다는 금방이라도 흐이를 뒤집어버릴 것처럼 출렁거렸다.

한국섬선교회(최종민 목사) 소속 방주호는 길이 8m, 2.5t급 선박으로 1주일에 두 번 운행한다. 매주 금요일 속회 모임과 주일예배를 위해 인근 월도와 소도, 추도 등 3개 섬을 순회한다.

육도에는 현재 18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민 평균 나이는 68세다. 교회에는 8명이 나온다. 겨울엔 육지를 찾는 주민이 많아 출석자도 줄어든다. 이날 주일예배에는 이 교회 최영채(59·여) 권사와 최 성도만 드렸다. 유 전도사에 따르면 파도가 높은 날이나 풍랑주의보가 발효될 때면 2∼3주간 아예 교회가 텅 비는 날도 있다고 한다.

최 권사는 “섬에 무당과 잡신 숭배가 심했다”며 “무당소리가 싫어서 예수를 믿었다”고 말했다. 육도 역시 연초에 유황제라는 마을 제사를 지내며 만선을 기원했다. 최 권사는 회고하듯 “지금은 교회 덕분에 섬 문화가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올해로 3년째를 맞은 유 전도사는 “섬은 하루하루 사는 게 고민이고 날씨를 보면서 배 운항을 결정하는 게 일상”이라며 “도시보다 더 가까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할 수 있는 게 특권”이라고 말했다.

이틀간 돌아본 남해와 서해의 섬 선교 현장은 치열했다. 하지만 희망이 넘쳤다. 교인 간 반목이나 교단 간 분쟁도 없었다.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따르려는 순종 하나만 보였다(신바람낙도선교회 061-726-4445).

여수·보령=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