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하 칼럼] 새해가 필요한 진짜 이유

입력 2014-01-04 01:27


갑오년 새해가 힘찬 말 울음 소리와 함께 우리 곁에 달려왔다. 송구영신부터 근하신년까지 저마다 새해 덕담으로 분주한 시간이었다. 특히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기발한 이미지와 영상으로 가히 홍수를 이루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드에 정성껏 글씨를 써 인사를 나누었는데, 너무 간편해진 새해 인사가 별로 반갑지 않게 느껴진다. 바뀐 점은 이뿐이 아니다. 옛날 우리 조상은 새해 덕담을 미래완료형으로 했다고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셨다지요?” 그런데 지금은 새털 같은 희망사항 정도에 머문다.

듣자니 많은 사람들이 큰 피로감 속에 2013년을 보낸 듯하다. 돌아보면 해마다 우여곡절이 많았겠지만 ‘다사다난’과 ‘격동’이란 말과 함께 서둘러 한 해를 정리해 버린 느낌이다. 아마도 지난 1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대립과 갈등의 묵은 기운이 새해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새해에는 다시 잘해보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물론 바보들은 결심만 할 것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작심365일할 것이다.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조르주 퐁피두는 ‘삶의 질’이라는 연설에서 프랑스에서 중산층의 조건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외국어 하나, 악기 하나, 스포츠 하나 즐길 수 있는 능력, 자랑할 만한 요리법, 남을 돕는 봉사활동.’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어느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중산층의 조건은 ‘2000㏄ 이상 승용차, 현금 1억원, 30평형대 아파트, 월급 500만원’이라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짬을 내서 노력하면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웬만한 사람 아니면 중산층이 되기 힘든 조건이다.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외국어를 익히고, 서툰 솜씨로 악기나 운동 또는 요리 연습을 하고, 남을 도우면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지만 우리는 행복으로 가는 길을 잃어 버렸다. 상대적으로 양극화와 박탈감이 더 느껴지는 이유다.

그럼에도 새해가 아름다운 것은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새해에 사람마다 공통점이 있다면 소원을 품는다는 것이다. 기대와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다시 출발하는 새로운 기회는 그래서 희망이 있다. 그 꿈은 내 삶에 생기를 주는 신비다. 그 믿음은 미래를 맞는 능력이다. 아일랜드 기도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꿈꾸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꿈이 소중하기에 꿈 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공감대가 크다. ‘어떤 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어떤 이는 꿈을 나눠주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을 이루려고 사네. 어떤 이는 꿈을 잊은 채로 살고, 어떤 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은 없는 거라 하네…. 저마다 자기가 옳다 말을 하고, 꿈이란 이런 거라 말하지만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한때를 풍미한 록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이 부른 ‘어떤 이의 꿈’ 일부다.

그럼에도 새해를 맞으면서 마음에 불편함을 감추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그런 꿈의 영역마저도 관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일상의 안부인사인 “안녕들하십니까”가 젊은이들의 마음에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그만큼 하루하루의 삶이 불안하고, 미래에 거는 기대가 암담한 까닭이다. 가장 큰 책임은 당사자가 아니라 현실과 꿈을 이어주는 공감과 소통의 부재 탓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할 여야 정치인들, 무엇보다 최고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대통령에게 ‘들을 귀’가 필요하다.

경험에 따르면 웬만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더라도 일방적인 독주는 금물이다. 그동안 문제가 불거진 교회들을 보면 독선적인 일방통행과 폐쇄적인 운영방식 때문이다. 특히 자기가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옳다고 생각하는 ‘지저스 콤플렉스’로 가득한 목회자 등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자주 교회가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사고방식은 목회에도, 정치에도 용납되기 어렵다. 이러한 불통이 반복되면 우리 공동체는 골병이 들게 마련이다.

바라기는 적어도 새해만큼은 자유롭게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이든, 정치 영역이든 하루하루 작은 진보(進步)가 있어야 희망적이다. 본회퍼 목사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고 한 길을 간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길을 알고 계신다.” 새해가 존재하는 진짜 이유다.

(사단법인 겨레사랑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