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반죽해 새 생명을 뽑아내다… 김숨 소설집 ‘국수’
입력 2014-01-03 01:28
“그래요, 지금은 반죽의 시간입니다. 분분 흩날리는 밀가루에 물을 한 모금 두어 모금 서너 모금 부어가면서 개어 한 덩어리로 뭉쳐야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부르튼 발뒤꿈치 같은 덩어리가 밀크로션을 바른 아이의 얼굴처럼 매끈해질 때까지 이기고 치대야 하는 시간이지요. 야무지게 주물러야 하는…….”(‘국수’ 도입부)
소설가 김숨(40)의 신작 소설집 ‘국수’(창비)를 읽으면서 ‘2014년은 어쩌면 국수를 만드는 노동의 숨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도 좋을 것’이라는 상념이 스쳐갔다. ‘국수’의 주인공은 ‘나’이지만 실상 이 단편이 그려내는 대상은 ‘나’의 새어머니다. 새어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난 여자다. ‘나’의 어머니가 죽은 후 그녀는 혼인신고도 없이 아버지와 오랜 세월을 같이 살면서 ‘나’와 동생들을 마치 자신이 낳은 아이들인 양 기른다.
국수는 새어머니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주 해주던 음식이다. ‘나’는 새어머니의 삶을 그녀가 마치 손님처럼 마루 한쪽에 오도카니 앉아 국수를 빚기 위해 밀가루 반죽을 이겨대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당신이 우리와 살러 왔을 때 꼭 지금의 내 나이였으니 말이에요. 마흔셋이던 당신은 일흔두 살이, 열넷이던 나는 마흔세 살이 되었으니… 당신이 오던 날 친척어른들이 방 안에 모여 쉬쉬 나누던, 석녀(石女) 어쩌고 하는… 애를 낳지 못해 이혼당한 여자라는 소리를 엿들어서였을까요. 어린 내 눈에 당신은 그저 식모살이를 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처럼 기가 죽어 보였던 것이요.”(‘국수’에서)
그러나 ‘나’는 점차 새어머니가 지닌 끈질긴 생명의 힘을 느끼게 된다. ‘나’는 직장에서 해고당했을 때나 아이를 유산했을 때, 새어머니가 만든 국수를 먹고 싶어 한다. 이제 ‘나’는 인공수정 시술을 받으러 가던 중 불쑥 어머니 집에 들른다. 새어머니는 혀에 암이 생겨 혀를 잘라내고 싶다고 할 만큼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혀가 말이다. 혀가… 국수가 닿기만 해도 혀가 대패에 쓸리듯 아파서…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는구나. 혀 좀… 혀 좀 끊어줘라.”
‘나’는 신음을 토하며 잠든 새어머니를 위해 국수를 만든다. 국수를 만드는 노동은 새어머니에게서 ‘나’에게로 전승된 것이다. 그것은 곧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노동에 다름 아니다. 이질적인 것 사이에서 태동하는 생명의 기운이야말로 삶의 영원한 화두일 수 있다.
또 다른 수록작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의 주인공은 임신 때문에 집에 갇혀있다시피 한 상태다. 그녀는 양은들통에 오리 뼈를 고고 있다. 오리곰국은 시아버지가 줄기차게 먹어온 것이다. 누리끼리한 기름과 뼈 고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차 그녀는 질식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녀를 숨 막히게 하는 기름과 냄새는 실제라기보다 오히려 편집증적인 망상에 가깝다.
아버지가 살던 빌라를 팔아 펀드에 투자했다가 돈을 날려버린 남편은 그런 사실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지 못하는데 그녀는 남편의 늦은 귀가가 ‘아버지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강박에 시달린다. 그리고 마침내 시아버지가 그 돈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할까봐 두려워한다. 이 현실이야말로 오리기름이나 냄새보다 더 그녀를 짓누르는 강박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망상과 강박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빌라계단을 내려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노인을 찾기 위해 그녀가 노인을 찾아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과 202호 여자가 돌아와 있기를 바라며.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강박의 원인이었던 시아버지를 스스로 찾아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은 분명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김숨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미묘한 조짐에서 리얼리티를 발견해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필터링한 후 다시 우리에게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