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한장희] 환율 전쟁 대처법

입력 2014-01-03 01:47


독일은 최근 몇 년간 환율 때문에 재미를 봤다. 아이러니하게 도입을 꺼렸던 유로화가 효자노릇을 한 것이다. 2002년 유럽 통화가 통합됐을 때 독일인들은 정든 마르크화를 버리는 게 달갑지 않았다. 유로화 사용 5주년 설문조사에서 독일인 절반 이상이 ‘유로화 채택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답할 정도였다. 최근엔 분위기가 달라졌다. 마르크화 추억을 얘기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로화 도입 후 경제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강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수출로 먹고사는 독일 경제에 유로화는 날개를 달아줬다.

독일이 그리스와 무역을 해 흑자가 나면 독일의 통화가치는 상대적으로 올라가야 한다. 통화절상이 되면 독일에서 만드는 제품 단가가 높아진다. 하지만 독일은 유럽 다른 국가들과의 무역에서 계속 흑자를 내는데도 통화가치가 절상되지 않았다. 유로존 가입국 경제상황의 평균치가 유로화에 반영되는 바람에 평균 이상인 독일은 오히려 통화가치 절하 효과를 누렸다.

지난해 독일에서 만난 경제학자들도 “통화가치가 높았던 마르크화를 계속 갖고 있었더라면 독일 수출 경쟁력이 이만큼 확대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유로화는 유럽 국가 전체를 독일 내수 시장으로 만들어줬다. 뿐만 아니라 단일 통화로 제품 가격이 정확히 비교돼 품질이 나은 독일 제품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이른바 ‘양적완화’에 나섰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조절해 유동성을 조절하는 간접방식이 아닌 국채나 다른 자산을 사들이는 직접방식으로 시장에 달러를 푼 것이다. 달러 가치를 하락시켜 자국의 수출경쟁력을 높이는 게 주목적이다. 독일과는 다르게 다분히 의도적으로 환율에 개입한 것이다. ‘아베노믹스’라고 불리는 일본의 경제정책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미국이 풀어놓은 달러는 고삐 풀린 듯 투자처를 찾아 신흥국으로 밀려들었다. 달러 유입이 갑자기 멈췄을 때 닥치게 될 가혹한 결과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급등하는 주가에 ‘경제가 좋아진 것’이라는 착각이 이들 나라에 번졌다. 미 달러가 다시 악마 같은 위력을 보인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경제지표가 호전되자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신흥국에 몰려들었던 달러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신흥국 주가 폭락 상황은 그렇게 초래됐다. 이를 두고 테드 트루먼 전 미 재무부 차관보는 “신흥국에 펀치볼(화채그릇)을 줬다가 갑자기 빼앗은 격”이라고 빗댔다.

자국 통화 가치가 올라가면 겉으로는 화려하다. 외국 여행 때 돈 쓰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속으로 골병이 들어가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전 세계는 자국의 돈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 방한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가 “환율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다. 원·엔 환율이 추락하며 수출기업의 목을 죄고 있다. 그나마 외환당국이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경험하며 관록이 붙은 점은 다행이다. 하지만 지난해 미 정부가 원화 값이 적지 않게 올랐음에도 우리 정부를 콕 집어 외환시장 개입을 자제하라고 경고한 점을 볼 때 올해도 간단치 않은 전쟁을 치러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비록 큰소리를 못 낼 형편이라도 신흥국들처럼 앉아서 당하지 않을 정도의 체력은 마련해 놔야 한다.

한장희 경제부 차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