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조랑말 ‘초원의 옛 영광’을 꿈꾸다
입력 2014-01-02 01:30
갑오년 ‘말의 해’ 맞아 가시리 조랑말체험공원 조명
2014년 ‘말의 해’가 밝았다. 힘과 스피드, 그리고 충성심을 상징하는 말은 한민족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숙한 동물이다. 신라의 기마인물형토기와 천마도 등 말을 소재로 한 국보급 문화재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듯이 말 중에서도 으뜸은 제주 조랑말이다. 조선시대 최대의 말 사육장으로 유명한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로 새해 첫 여행을 떠나본다.
임금이 타는 어승마(御乘馬)를 비롯해 군마, 종마, 역마, 파발마 등을 사육했던 가시리는 600년 목축문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이다. 따라비오름을 비롯해 13개의 오름에 둘러싸인 가시리는 한라산 고산지대와 해안지대를 연결하는 중산간 초원으로 갑마장(甲馬場)이 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갑마’는 조선시대 최고등급의 말이고, 갑마장은 조정에 진상하기 위해 선정된 갑마를 모아 길렀던 목장을 말한다.
제주도를 대표하는 말 목장이었던 가시리가 갑오년 ‘말의 해’를 맞아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몇 해 전 주민들의 힘으로 조성한 조랑말체험공원이 자리를 잡은 덕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마을설립(里立) 박물관인 조랑말박물관을 비롯해 승마장, 게스트하우스, 아트숍, 카페 등으로 이루어진 조랑말체험공원은 조랑말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단순한 승마체험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석항공관과 가시리마을 사이에 위치한 조랑말체험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수십 마리의 조랑말이 제주도의 거친 바람과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꼿꼿한 자세로 커다란 눈망울에 한라산과 성산일출봉을 담고 있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제주 재래마를 지금은 ‘제주마’로 통일해서 부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제주마, 탐라마, 제마(濟馬), 토마(土馬), 국마(國馬), 조랑말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그 중 조랑말은 상하의 진동 없이 아주 매끄럽게 달리는 주법을 의미하는 몽골어 ‘조로모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선사시대부터 제주도에서 서식한 말은 키가 과일나무 아래를 지날 수 있을 만큼 작아 ‘과하마(果下馬)’로 불렸다. 그러나 몽골과 서역에서 들어온 중형마와 대형말이 과하마와 교접하면서 약간 큰 말이 생겨나는 등 다양한 품종과 크기의 제주마가 등장했다.
이왈종 화백의 작품 ‘말’처럼 제주 조랑말은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아 어딘지 균형이 안 맞는 듯하지만 장거리 행군에 적합하고 지구력이 좋다. 칭기즈칸을 태우고 초원을 질주했던 말도 조랑말이요, 태조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탔던 말도 제주 조랑말이다.
제주 조랑말이 나고 자란 땅에 원통형으로 들어선 조랑말박물관은 가시리의 오름을 상징한다. 제주 조랑말의 생태와 목동인 말테우리의 삶, 제주마와 관련된 유물 등 100여점이 전시된 조랑말박물관에서 유독 눈에 띄는 유물은 남태이다. 남태는 원통형 나무에 수십 개의 말밥굽 모양 나무를 덧붙여 파종한 좁씨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다져주는 역할을 했던 농기구. 대부분의 유물이 가시리 주민들이 기증한 것으로 가시리 창작지원센터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가 보충되고 있다.
조랑말은 성격이 온순한데다 키가 작아 초보자도 쉽게 승마를 즐길 수 있다. 승마는 폐활량을 높여주고 신체균형을 잡아 자세를 교정해주는 운동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트랙을 한두 바퀴 돌며 조랑말과 친해지면 초원을 산책할 차례. 조랑말의 키가 120㎝ 남짓한데도 말에 올라 고삐를 쥐면 잣성에 둘러싸인 초원이 발아래 펼쳐진다.
가시리에는 갑마장과 주변 가시리 마을을 에두르는 20㎞ 길이의 갑마장길이 조성되어 있다. 오랜 세월 방치됐다가 2011년에 선을 보인 갑마장길은 평탄한 트레킹 코스. 걷거나 말을 타고 갑마장길을 산책하다보면 드넓은 초원과 오름, 잣성 등 목축문화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잣담으로도 불리는 잣성은 중산간 목초지의 목마장 경계에 쌓았던 돌담으로 제주도 목축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말이 농경지에 들어가 농작물을 해치지 못하게 쌓은 잣성은 그 위치에 따라 상잣성, 중잣성, 하잣성으로 구분된다. 조랑말체험공원에서 출발해 큰사슴이오름(대록산)과 작은사슴이오름(소록산) 사이로 지나는 기다란 돌담은 상잣성과 하잣성 사이에 위치한 중잣성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돼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갑마장길 중 가장 아름다운 코스는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는 따라비오름. 3개의 크고 작은 분화구가 말발굽처럼 생긴 따라비오름은 능선이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데다 억새가 장관이다. 정상에 서면 ‘오름 일번지’로 불리는 구좌읍 송당의 높은오름, 백약이오름, 좌보미오름의 스카이라인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전장을 누비던 제주 조랑말의 후손들이 말발굽 소리 요란하게 질주하는 장관은 한라산 상공이 붉게 물드는 해질녘에 펼쳐진다. 승마장이나 초원에서 하루 종일 관광객들과 호흡을 같이 한 녀석들은 고삐가 풀리고 잣성의 문이 열리자마자 휴식처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말발굽이 메마른 대지를 박찰 때마다 뽀얀 먼지가 피어오르고 곧추선 말갈기와 말꼬리, 그리고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꿈틀거리는 제주 조랑말의 강인한 근육은 갑오년 새해를 상징한다. 초원을 질주하던 제주 조랑말이 옛 영광을 꿈꾸는 곳. 그곳은 시간을 더한다는 가시리(加時里) 마을이다.
제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