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이동훈] 문제는 낙하산이야

입력 2014-01-02 01:49


지난 연말 금융권 최고 화제는 기업은행 인사였다. 남성 위주 문화가 지배하는 은행권에서 워킹 맘이 유리천장을 뚫고 국내 최초 여성 은행장이 된 것이다. 다분히 여성 대통령의 여성 중시 의중이 담긴 인사였다. 권선주 신임 행장이 지난달 30일 취임사에서 대통령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말을 한데서 그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하나금융 신한금융 등 다른 금융기관들도 대통령 눈치를 봤는지 여성들을 잇따라 은행 임원으로 승진시켰다. 고용노동부는 금융권의 연말 인사가 절정에 이른 30일 2016년부터 여성 고용률이 저조한 대기업과 공공기관 명단을 공개하겠다며 여성 고용 중시 정책을 내놨다.

CEO 운신 폭 줄면 효율 떨어져

그런데 이번 기업은행장 인사와 시중은행들의 후속 인사를 뉴스로 다루면서 여성 약진이라는 신문 헤드라인에 가려져 부각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내부 승진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금융권의 마이너리티라는 여성의 고용평등 이슈가 그만큼 중요해 여성발탁 자체가 크게 취급된 것이지만 2회 연속 기업은행장 내부 발탁 사실은 최근 공공기관의 방만 경영 이슈가 불거진 상황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가 최근 제시한 공공기관 개혁을 위한 가이드라인은 부채 감축에 무게가 실려 있다. 기관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연봉 삭감과 직원들의 복리후생비 축소가 핵심 축이다. 일반 국민들에게 어필하는 데 공공기관 종사자들의 철밥그릇을 까발리는 것만큼 좋은 수단이 없을 듯도 하다. 이는 철도노조 파업에서 원칙을 중시하는 박근혜정부의 뚝심이 먹힌 점을 감안할 때 관철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정부가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공공기관 정상화 대책에 보이지 않는 것 하나는 낙하산 인사 근절 대책이다. 이는 방만 경영 척결은 물론 특히 금융산업의 미래와 관련해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역대 정부는 금융 공기업 인사 때마다 이른바 모피아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려보냈다. 모피아는 행정고시 재경 출신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다. 금융정책을 주물러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낙하산 인사’라는 딱지는 부임 초부터 모피아 출신 기관장들의 운신의 폭을 좁혀 놓는다. 노조는 현수막을 내걸고 텐트 농성을 벌여 복리후생비 인상 등 당근을 받아 챙겼다. 그 맛에 취한 금융기관 종사자들은 ‘모가지’가 달랑거리는 임원으로 승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만년 부장으로 눌러 앉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기엔 평생 일해봐야 최고경영자(CEO)는 꿈도 꾸지 못하는 금융 엘리트 사회의 서글픔이 녹아 있다.

3년 전 이명박정부는 내부 인사인 조준희씨를 기업은행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기업은행 직원들은 은행 선배인 조 전 행장 밑에서 만큼 신나게 일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조 행장이 이끈 기업은행의 지난해 3분기 당기순이익은 6855억원으로 덩치가 큰 국민은행(6466억원)을 제치고 신한은행(1조687억)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돼 금융시장이 침체된 상황에서 대약진이 아닐 수 없다.

기관장은 내부발탁 선임해야

평균 연봉 1억1358만원으로 신의 직장 1위인 한국거래소는 어떤가. 낙하산 이사장 발탁 때마다 노조의 반대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거래소는 2012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B등급에서 D등급으로 추락했다. 신의 직장 2위인 한국예탁결제원(평균 연봉 1억78만원)은 A등급에서 C등급으로 밀렸다. 거래소를 비롯해 10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금융 공기업 직원들은 공공기관 정상화 대책을 보며 “이젠 좋은 시절 다 갔다”고 푸념한다고 한다. 정부는 이제 이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그만 낙하산을 접고 기업은행처럼 기관장을 내부 발탁하는 것이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동훈 경제부장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