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예산안 처리 둘러싸고 만성화된 정치권 행패
입력 2014-01-02 01:37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의 헌법 및 법률 무시 행태는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새 회계연도 시작 30일 전인 12월 2일까지 새해 예산안 심사를 마치도록 헌법에 버젓이 규정돼 있지만 시한 준수는커녕 쪽지 예산 논란까지 불러일으키는 범법의 상습화가 심각한 수준이다. 2003년부터는 11년 연속으로 법정시한을 어겼다. 국민을 무시하는 정치권의 행패가 도를 넘었다는 말이다.
대선 공방을 벌인 이번 19대 국회는 한 달이나 지각 개원하면서 상임위원장을 늦게 선출해 국회법도 어겼다. 도대체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앞장서서 법을 어기니 국민 어느 누가 법의 존엄과 가치에 승복하겠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새해 예산안 심사가 법정시한을 준수한 것은 단 6차례에 불과했다.
더욱 한심한 사실은 입법부의 습관화된 지각 예산안 통과에 길들여진 행정부의 안이한 행태다. 수준 미달인 국회의 행태를 속절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 비상대책은 전혀 세우지 않고 있었다. 정치권의 갈등이 첨예화돼 예산안이 정상적으로 통과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준예산을 편성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번에도 명백하게 회계연도가 개시되기 전까지 국회에서 예산 의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
회계 개시일 첫날에 예산안이 통과됐기에 망정이지 여야 대치가 장기화된다고 가정할 경우 무정부 상태를 유지해도 좋다는 말인가. 또 행정부가 국회의 예산안 통과를 촉구하는 의미에서도 전년도 예에 따라 준예산을 짜놔야 한다. 국회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덩달아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않는 것은 공복의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의 처신은 두고두고 논란거리다. 대기업 특혜를 주장하며 외국인투자촉진법을 통과시키지 못하겠다는 충정은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지만 이미 여야 간 충분한 토론을 거쳐 합의한 사안을 법사위원장이란 직위를 이용해 가로막는 것은 자칫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보여주기 정치로 오해받기 쉽다. 여야 합의정신에 위배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정치가 신뢰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박 의원이 더 잘 알 것 아닌가.
시한에 임박해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국회의 나쁜 습성이 자신의 지역구 예산을 반영하는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비밀 아닌 비밀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여론에 떼밀려 해를 넘기기 전 예산안을 서둘러 통과시키는 체하면서 자기 밥그릇이나 다름없는 지역의 민원사업 재원은 한 푼도 빠뜨리지 않는 악습은 이제 버릴 때도 되지 않았는가. 모름지기 한 나라와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되고도 배지에 연연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소인배 정치를 끝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