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나에 대해 3인칭으로 말하기

입력 2014-01-02 01:31


갑오년의 태양이 솟아올랐다고 하지만 2014년의 첫날을 맞이한 흥분보다 2013년의 중력에 더 이끌리는 소회가 있다. 송구영신이라든지, 희망찬 새해라든지, 혹은 신년을 맞는 각오 같은 게 왠지 해마다 되풀이되는 판에 박힌 구호만 같아서 이에 대한 저항감이 2013년의 중력을 불러온 것인가, 라고 나 자신의 속내를 짚어보다가 우연히 열어본 가방 속에 그 중력의 실체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미소가 지어졌다.

가방 안엔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83)의 최신 단편집 ‘디어 라이프’와 프랑스 원로 작가 로제 그르니에(95)의 단편집 ‘짧은 이야기, 긴 사연’이 들어 있었다. 지난 연말, 지하철 안에서 틈틈이 읽다가 가방 안에 넣어둔 채였다. 딴은 두 작품집은 작가의 오랜 연륜이 묻어나는 문장으로 인해 독후(讀後)의 기시감 같은 게 느껴졌던 터이다.

그들의 문장을 읽을 때 그 문장을 구성하는 벽돌들이 허물어진 뒤 나의 내면에서 재조립되는 쾌감 같은 게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쾌감이 어디서 왔는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한참 생각을 공 굴린 끝에 내린 결론은 두 원로 작가의 글쓰기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3인칭으로 말하기’였다.

예컨대 어긋난 두 중년 남녀의 사랑을 그린 그르니에의 단편 ‘짧은 이야기, 긴 사연’엔 “그는 늙어갈수록 더욱더,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지, 그들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세상을 뜨게 될지 알고 싶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문맥을 살펴보건대 ‘그’는 그르니에와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르니에는 ‘나’를 ‘그’로 객관화시켜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먼로의 단편 ‘디어 라이프’는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에서 미친 사람으로 알려진 한 노부인이 잔디밭 유모차에 잠들어 있던 ‘나’에게 접근해오자 어머니가 허둥대며 달려와 어린 ‘나’를 안고 집 안으로 피신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먼로는 어머니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노부인의 입장에서 재해석해낸다. 두 작가 모두 3인칭 시점을 통해 ‘나’의 주관성을 객관화하고 있었다.

나이 듦이란 지혜의 다른 말이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원로가 드물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이는 아집 없는 중용의 미덕을 갖춘 지식인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래서였을까. 우리에게는 그토록 드물다는 원로의 문장을 그르니에와 먼로에게서 발견하고 틈틈이 읽기 위해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지난해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나’의 목소리가 너무 컸고 요란했다. 국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라고 선언하는 동시에 ‘나’와의 긴밀성에 의해 객관적인 거리감을 잃어버리기 쉽다. 철도노조와 국토교통부가 수서발 KTX 설립 허가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주파수의 목소리를 낼 때 거기 3인칭은 없었다. 아니, ‘나’라는 주관성은 ‘나’를 해방시키기는커녕 그 주관성으로 인해 ‘나’는 파괴되고 만다. 주관성이 전혀 헤아리지 않는 것을 더 주의해서 살펴보려면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그 관계는 상호 배제의 모습이 아닌 상호 내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발견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2014년은 희망이 없다.

그러고 보니 구랍 17일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문학평론가 반세기를 정리한 문학선 ‘체념의 조형’의 제목에 대해 “그건 릴케의 시에서 따온 말이며 사람이 어떤 것을 인지할 때 그 인지능력의 주관성을 포기해야만 사물의 본질에 가닿을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 역시 ‘나 자신에 대해 3인칭으로 말하기’에 맥락이 닿아 있다. 올해는 ‘나’ 자신에 대해 3인칭으로 말하는 해가 되었으면 싶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