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만호 (7) 순교자 집안 딸과 결혼… 주님은 축복의 하얀 눈을
입력 2014-01-02 02:31
함평군은 작은 동네이기 때문에 교회 간 소식이 활발하게 오갔다. 어느 교회 누구라고 하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처녀는 김성율 장로님의 외손녀로 한국전쟁 때 순교하신 박병헌 집사의 둘째 딸이었다. 나도 김 장로님께서 궁산교회 수석 장로로서 옥산교회를 개척하시고 함평 교계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는 것을 고등학교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총각이 맞선 볼 처녀 집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재촉하셨다. 고향 집에서 약 6㎞ 떨어진 곳으로 궁산교회가 있는 동네였다. “김성율 장로님을 보나 순교하시기 전 박병현 집사님을 보나 뼈대 있는 가문임에 틀림없다. 순교자가 나온 신앙 있는 집안이다.” 고모님의 말씀을 듣고 내심 결정을 한 상태였다.
처가 동네는 궁산교회를 중심으로 30가구 정도로 이뤄진 동네였다. 100%가 신자여서 예수 냄새가 난다고들 하는 곳이었다. 농촌교회에는 200여명이 모였는데 김도빈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셨다.
먼저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교회 바로 밑에 있는 처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친척 몇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친척들은 간단히 식사를 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다들 나가셨다. 처녀와 나만 안방에 덩그러니 남았다.
오랜 침묵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나 귀댁이나 결혼 정년이 되었으니 결혼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낭만도, 멋도 없는 프러포즈였다. 처녀의 얼굴을 봤다. 나를 쳐다보더니 빙긋 웃는 게 아닌가. ‘됐다!’
나는 답을 얻은 것으로 알고 또다시 선포를 해버렸다. “10월 9일이 휴일이니 이때 약혼하고 내년 1월 9일에 결혼을 합시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박장대소를 하셨다. “만호야, 결혼 일자는 신부 측에서 잡는 거란다.” 어머님이 웃으시면서 잘했다고 하셨다. 약혼식은 광주의 음식점으로 정했다. 김 목사님을 모시고 양가가 모여 10월 9일 약혼을 치렀다. 신부는 영광농협에 근무하고 있었다. 순서가 뒤바뀐 것 같지만 연애편지 같은 편지를 한 주에 한 번씩 보냈다.
1970년 1월 9일에 처가 교회인 함평 궁산교회에서 김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 사진을 보았더니 얼마나 경황이 없었는지 신부 자리에 내가 서고 신랑 자리에 신부가 서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주변에선 축복 속에 아름다운 결혼식이라고들 좋아했다. 결혼식 당일은 처가에서 하루 쉬고 시댁으로 가는 풍습에 따라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혼식 다음날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은 신랑 신부에게 복이 있다는 징조’라며 다들 좋아하셨다. 고향집으로 가는 길은 약 6㎞ 거리였다. 마을길에서 대로변까지만 해도 1㎞가 훌쩍 넘었다. 온 동네 청년들이 나와서 우리가 탄 차 앞에서부터 눈을 쓸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1시간 정도 차 안에서 왕처럼 호강을 했다. 고향 마을에서도 큰길에서부터 집까지 1㎞를 동네 사람들이 나와 눈을 치워줬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즐겁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다.
결혼 후 3일 만에 전세로 준비해 놓은 서울 집으로 ‘신혼여행’을 왔다. 지금의 결혼문화와 많이 다르지만 당시 소박한 결혼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지금도 처가 동네에 가면 어르신들로부터 ‘눈 쌓인 길을 치우며 보내줬던 신랑’이라는 말씀을 듣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