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후 20년, 미래 20년] 정상회담·천안함 폭침 사건 등 협력·갈등 반복된 애증의 20년
입력 2014-01-01 01:30
2014년 갑오년(甲午年)은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지 20년 되는 해다. 1948년 정권을 잡은 김 주석은 1994년 7월 8일까지 북한에서 무려 46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후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 손자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차례로 권력을 세습하면서 동북아시아 지형도 크게 바뀌었다. 남북 관계는 부침을 계속했다. 혈맹이었던 북·중 관계는 물론 북·미, 북·일 관계도 북핵 문제 등 상황 변화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김일성 주석 생전에 남북은 체제 대결이 중심이었다. 대화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김 주석 사망 이후엔 남북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협력과 갈등이 반복된 애증의 20년이었다.
◇김 주석 사후 본격화된 남북대화=김 주석이 사망한 후 북한 정권을 계승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부터 남북 협력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특히 남한에서도 ‘햇볕정책’을 내세운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협력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 대표적 사건이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남북에 서로 다른 정부가 들어선 지 무려 52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징성이 큰 회담이었다. 당시 남북 정상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며 남북관계를 대결이 아닌 협력의 관계로 정의했다. 6·15선언의 주요 내용은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및 경제협력 등 남북 간 교류 활성화, 김 위원장 답방 등이었다. 이에 따라 그해 8월 15일에는 제1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져 흩어진 가족이 혈육의 정을 나눴다. 남북 협력 사업도 활기를 띠었다.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시작으로 2000년 9∼10월에는 경의선 연결 및 개성공단 기공식이 열렸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7년에는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대화와 대결의 공존, 그리고 북핵 문제=김 주석 사후 20년 동안 남북은 많은 갈등을 빚었다. 1994년 김 주석 사망 직후에는 ‘조문파동’으로 남북이 대화 통로를 닫았고, 2000년대에는 핵 문제로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다. 실제 1999년에는 ‘연평해전’으로 6·25전쟁 후 남북 간 첫 군사 교전이 벌어졌다. 2008년에는 박왕자씨 피살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다. 또 2010년에는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우리 정부의 5·24 대북제재 조치로 이어져 남북 간 왕래 및 교역이 완전히 끊기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에는 남북관계의 ‘마중물’로 불리는 개성공단이 가동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북핵 문제는 남북을 넘어 국제사회의 이슈가 됐다.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012년 2월 3차 핵실험까지 실시하며 ‘핵보유국’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국제사회는 유엔을 중심으로 대북 제재를 이어나가고 있다.
김 주석 사후 남한에선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정부가 들어서며 진보와 보수 정권이 교대로 이어졌다. 이에 대북 정책도 완화에서 강경으로 부침을 겪었다. 북한에선 김 주석 손자인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2011년부터 정권을 잡았다. 김 제1비서는 핵무력·경제건설 병진 노선을 고수하며 여전히 군사적 위협을 늦추지 않고 있다. 특히 지난해 12월에는 실질적 2인자이자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하면서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등 남북관계는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고 있다.
모규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