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후 20년, 미래 20년] 변화 모색하는 일본… “납치문제 해결 없이 수교 없다”

입력 2014-01-01 01:27

북한 김일성 주석의 항일 무장투쟁이 국가 이데올로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북한과 일본은 광복 이후 정부차원의 교류가 없었다. 일본은 한국과 1965년 국교정상화를 이루면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한국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탈냉전의 분위기 속에 한국의 적극적인 북방정책이 북한을 자극해 북·일관계도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일본으로서도 유일한 미수교국인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전후 문제를 완결 짓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 9월 가네마루 신 당시 자민당 부총재 등이 평양을 방문해 김 주석과 회담한 뒤 빠른 시일 내에 국교수립 개시 협상에 합의한 것은 양국 관계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후 양국은 1991년 1월부터 10차례 이상 수교회담을 이어갔지만 그때마다 현격한 과거사 인식차이와 미사일 문제 등 변수가 발생하면서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양국은 2002년과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과거사 사과와 배상, 일본인 납치자 문제 등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듯했다.

이후 북한이 반환한 납치 피해자인 요코다 메구미의 유골이 가짜로 드러나고 핵개발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정상화 문제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렇다 할 관계진전이 없던 양국은 2009년 민주당 정권 출범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2012년에는 일본인 유골 반환과 북송 일본인 처 일시 귀국문제 논의를 위한 적십자회담이 10년 만에 이뤄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 없이 수교도 어렵다는 대북 강경여론이 누그러들지 않고 있다. 특히 2012년 출범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선거 과정에서도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었을 만큼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어 양국 국교 정상화에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 핵과 미사일이 안보상의 위협으로 부각되면서 ‘깡패국가’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관계 정상화는 이들 문제의 해결 없이는 어렵게 됐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이 전제되지 않으면 양국의 관계진전은 앞으로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