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후 20년, 미래 20년] 추이 지켜보는 미국… 6자 회담 등에 소극적, 위험 관리에 주력
입력 2014-01-01 01:27
해방 이후 북한 역사는 ‘1994년 전’과 ‘그 후’로 크게 나눌 수 있다는 데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도 동의한다. 분수령이 되는 1994년은 물론 김일성 국가주석이 사망한 해를 가리킨다. 하지만 대변화는 김 주석이 사망하기 전부터 시작됐다. 1990년대 초 소련의 해체와 냉전의 종식, 소련과 중국 간 대립 완화 등의 국제정세 변화는 북한에 메가톤급 충격으로 다가왔다.
데니스 핼핀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연구원은 “김 주석이 구상하고 1980년대까지 상대적으로 원활하게 운용된 북한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소련과 중국의 무상원조에 기초한 것이었다”면서 “당시 북한과 중국·소련과의 무역은 ‘위장된 원조’였다”고 말한다. 소련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양국이 북한에 원조를 제공해야 할 이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원유와 각종 기계부품 등의 공급이 끊기면서 비료와 전력을 이용한 관개수로에 과도하게 의존한 북한의 농업생산도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여기다 1995∼96년의 기상이변까지 겹치면서 북한의 농업생산 기반은 붕괴됐다. 1995∼2000년 최소 50만명 이상이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일성의 뒤를 이어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된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 북한 외교의 최대 목표는 ‘체제의 생존’이었다. 체제 유지를 위해 북한이 선택한 수단이 ‘핵 위협’이었다. 김 주석 사망 이후 북한의 대외정책은 한마디로 ‘핵무기 외교’로 요약할 수 있다.
북한 지도부가 핵무기 개발에 올인한 것은 첫째는 미국 등 적대국이 북한을 공격할 수 없도록 하는 군사력 억지력 확보, 둘째는 서방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외교적 협박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996∼2001년 미국 한국 일본 등이 별다른 조건 없이 북한에 594만t에 이르는 막대한 식량을 지원한 데는 북한의 핵개발 포기를 얻어내려는 목적이 컸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북한은 결국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으로 루비콘 강을 건넜고, 10여년에 걸친 북-미 양자 협상, 6자 회담은 수포로 돌아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는 이름 아래 북한의 핵 협상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특히 2012년 초 어렵게 마련한 ‘2·19 합의’가 곧 이어진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깨지면서 백악관과 국무부의 실무 한반도 라인들도 북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잃었다고 얘기할 정도다.
지난해 말 한반도전문가들의 송년 모임에 참석한 백악관 당국자도 “북한은 예측불가능성이 표준인 나라”라며 “근본적인 신뢰 회복 조치를 북한이 내놓지 않는 한 미국이 6자 회담에 우선 참여한 뒤 핵무기 폐기를 논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의 외교소식통은 “특히 장성택 처형으로 북한 내부의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진 만큼 미국은 대화에 나서기보다 위험 관리에 주력하면서 사태 전개를 지켜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