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디아코니아, 요르단 ‘시리아 난민캠프’ 구호 사역 현장
입력 2014-01-01 01:32
30대 가장 수술 못해 소변주머니… 여덟 식구 생계 막막
내전을 피해 요르단으로 탈출한 시리아 난민들의 겨울은 혹독했다. 중동 지역을 덮친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는 난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무게를 더했다. 월드디아코니아(WD·이사장 오정현 목사)는 지난 18일부터 22일까지 요르단의 암만과 마프락, 자르카, 마다바 등을 방문해 시리아 난민 구호 사역을 펼쳤다.
국민일보는 지난해 12월 1차 구호 사역을 펼친 후 꼭 1년 만에 이곳을 다시 찾은 WD 구호팀을 동행 취재했다.
21일 암만 시내 서남쪽 마르즈하맘 지역의 연립주택 4층. 남편들은 일거리를 찾아 나가고 아이들과 엄마들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거실 하나에 방 둘인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시리아 하마에서 살다 지난 4월 요르단으로 탈출한 아흐마드 하순(46)씨 3형제와 가족 등 모두 21명. 세간은 간단한 주방도구와 얇은 카펫, 낡은 매트리스가 전부였다. 50㎝ 이상의 기록적인 폭설과 함께 영하의 추위가 몰아닥쳤지만 난방기구가 없는 집 안에는 냉기만 가득했다.
2남5녀의 어머니 히땀 하순(45)씨는 “처음 요르단으로 넘어와 자타리 난민캠프에 머물 때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면서 “캠프 바깥에선 비싼 월세를 물어야 하지만 일용직 노동이라도 할 수 있어 난민들은 대부분 캠프에서 나오려 한다”고 말했다. 긴장된 표정으로 구호팀을 맞은 이들은 전기난로와 식료품 쿠폰을 전달하자 비로소 “슈크란(감사합니다)”이라고 인사하며 웃음을 지었다. WD 구호팀은 이곳을 포함, 마르즈하맘의 26가정에 전기난로와 식료품 패키지를 전달했다.
구호팀은 앞서 19일에는 시리아 국경과 가까운 마프락의 변두리 허름한 집을 방문했다. “아흘란 와 싸흘란(환영합니다).” 아랍어로 인사를 건넨 하이삼 함마드(37)씨는 비스듬히 기댄 채로 구호팀을 맞이했다. 시리아 홈스에서 건축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내전 초기인 2011년 4월 집 앞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어떻게든 치료를 받기 위해 지난 1월 아내와 여섯 아이를 데리고 다마스쿠스를 거쳐 나흘 만에 국경을 넘었다. 유엔에 난민으로 등록해 1인당 매월 24디나르(약 3만6000원) 상당의 식료품 쿠폰을 지원받고 있지만 200디나르(약 30만원)의 월세를 내기도 버겁다.
난민들이 유입되면서 마프락의 인구는 6만명에서 10만명으로 급격히 늘었고 33㎡ 규모 주택의 월세는 70디나르(약 10만5000원)에서 3배 가까이 올랐다. 더욱 암담한 것은 이곳에서도 수술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르단 병원에서 수술 받으려면 7만 달러가 필요하지만 유엔에서 지원하는 수술비는 최대 1만2000달러에 불과했다. 소변주머니를 교체하기 위해 2주에 한 번 가까운 클리닉에 가는 게 그가 받는 치료의 전부다. 함마드씨는 “아내는 서른 살이고 막내는 1년8개월밖에 안 됐다”면서 “내가 다시 건강해져서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고 호소했다.
이어 찾아간 집에서는 역시 시리아 홈스 출신인 압둘 하미르 함단(40)씨가 구호팀을 맞았다. 그는 지난 9월 아내와 네 아이, 총상을 입은 동생네 가족 세 명과 함께 요르단으로 탈출했다. 함단씨는 “고향에서 옷가게를 했지만 내전 이후로는 장사를 할 수도,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었다”면서 “시리아를 바꾸려면 아이들이라도 제대로 교육시켜야겠다는 생각에 피난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의 맏딸 니스란(12)은 주 전체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해 의사가 되려는 꿈을 키워왔다. 내전 이후 모든 것을 보류했지만 요르단으로 넘어온 뒤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WD 중동지역 코디네이터 송명근 선교사는 “1년 전만 해도 요르단 학교에서 시리아 난민들을 받지 않았다”면서 “다행히 최근에는 2부제 수업을 도입, 오후에는 난민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요르단의 정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난민 아이들은 교회 등 구호단체가 운영하는 임시학교에 다닌다. 마프락연합교회가 예배당 2층에서 운영하는 난민학교에도 30여명의 난민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살리프 아웁(11)과 우레인(10) 형제는 홈스에 살다 지난 10월 엄마와 함께 요르단으로 탈출했다. 살리프는 “우리가 살던 동네는 모든 것이 부서졌고 아버지는 채소를 구하러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면서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 아버지를 찾고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WD는 마프락의 시리아 난민들을 위해 20가정 3개월분의 식료품을, 마다바의 난민 50가정에 유아용 분유와 기저귀 등 생필품을 지원했다.
2011년 3월 알 아사드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화되면서 발발한 시리아 내전은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 이후 최악의 난민 사태를 불러왔다. 내전 발발 이후 최소 12만명이 사망했으며 630여만명이 고향을 등졌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이 가운데 해외로 탈출한 난민은 233만여명이고, 57만여명은 전체 인구가 640만명에 불과한 요르단에 머물고 있다.
마프락연합교회 누르 사와네 목사는 “70개국 출신의 용병들이 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시리아 내전에는 외부 세력들이 깊숙이 개입해 있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지원과 기도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암만 북쪽 자르카의 나사렛교회 예배당에서는 19일 저녁 크리스마스 축제가 열렸다. 교회가 난민들을 위해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 40여명은 캐럴을 부르며 게임을 즐긴 뒤 WD에서 준 선물을 한 아름씩 받아갔다. 난민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자원봉사자 아실 압마리(21·여·요르단대학4)씨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말을 잘 하지 않고 웃지도 않던 아이들의 표정이 이제 많이 밝아졌다”면서 “상처 많은 아이들이어서 무엇보다 관심과 사랑이 절실한데 한국교회가 따뜻한 사랑이 담긴 성탄 선물을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WD는 이 교회에 학생 100명분의 문구류와 3개월분의 영어교육비를 지원했다.
21일 오전 11시 암만 마르즈하맘 교회에서는 시리아 난민 여성들을 위한 뜨개질 교실이 열렸다. 준비한 실과 바늘이 한정돼 있어 수강생 수를 20명으로 제한해 10여명은 되돌아가야만 했다. 요르단에서 시리아 난민들의 취업은 불법이다. 남자들은 몰래 막노동이라도 하지만 여성들은 그마저도 어렵다. 그러나 뜨개질을 배우면 가족들의 옷가지를 자급할 수 있고 숙련되면 내다 팔 수도 있다. 목도리 뜨는 법을 배우고 있던 살루와 하시니(40)씨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사무직으로 일했지만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서 “뜨개질은 재미 있고 살림에도 도움이 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강사는 그레이스 김과 라일라 리 등 한국 여성 선교사들이고, 교육을 마칠 무렵에는 이 교회 하산 다바브네 목사가 복음을 전한다. 마르자하맘 교회는 뜨개질 교실 외에 학생들을 위한 영어 강좌와 의료봉사, 식료품 지원 등의 사역도 감당하고 있다. WD는 이 교회에 난민들을 위한 여성 직업교육비와 학생 영어교육비, 의약품 등을 지원했다.
마르즈하맘 교회에서 협력 사역을 하고 있는 김영섭 선교사는 “요르단의 기독교 인구는 3% 안팎이지만 교회들은 시리아 난민 구호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난민 구호가 일회성이나 이벤트성에 머물지 않고 복음과 함께 효과적·지속적으로 전개되려면 현지 교회와 협력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WD의 시리아 난민 구호 사역을 지원하고 있는 서울 사랑의교회 대외협력담당 정병화 목사는 “1년 전 방문했을 때는 난민 아이들의 교육이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그동안 다소 개선된 것 같아 다행”이라면서 “이제는 영어 컴퓨터 태권도 등 아이들이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는 부가적인 교육과 여성들의 자활을 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암만(요르단)=글·사진 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