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기웅] 文筆의 세계, 그 이상향을 꿈꾸며
입력 2014-01-01 01:29
문필 생활을 살필 때마다 무거운 상념에 사로잡힌다. ‘문필’이란 문(文) 곧 ‘글’과, 필(筆) 곧 ‘글씨’를 가리킨다. 예로부터 글 짓고 글 쓰며 생활해 온 우리 동아시아의 선비 지식인의 전형적인 행태를 말함이니, 이들을 가리켜 문필가라 일러왔다. 문방사우란 종이, 붓, 먹, 벼루를 비롯해 여러 문필도구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문필가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었다.
내 어릴 적 그것과는 매우 달라진 길모퉁이의 문구 가게를 가끔 기웃거린다. 삶이 윤택해지고 풍요로워졌다는데, 책방과 문방구점은 오히려 옛 맛을 잃어간다. 우리 인생의 험한 유속이 느껴진다. 서울의 인사동 문화를 이끌던 통문관(通文館)의 산기(山氣), 서예가 검여(劍如)를 비롯한 문방 인걸들은 사라지고 더 보이지 않는다. 자취 감춘 그들과 함께 ‘운림필방(雲林筆房)’ 같은 멋진 이름의 문방 가게 자리엔 아파트 방을 바를 값싼 도배지 가게가 들어섰다. 이런 저런 변모는 할 수 없다지만 품위까지 잃어서야 하는 아픈 마음이다.
韓·中·日 공유하는 문방문화
재작년 6월 중국의 화선지 명산처를 탐방하는 값진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 여행에서 나는 한국이 중국과 공유해 왔던 과거와 현재 다가올 미래를 강렬하게 보았다. 화선지 원산지인 안후이성 쉬안청시 징(涇)현에서의 견학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곳의 포가선지(包家宣紙)는 포씨 집안이, 조가선지(曹家宣紙)는 조씨 집안이 대대로 이어오고 있는 화선지 명문이었다. 중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형 화선지 제지소인 ‘징현삼척대선지초지청’은 큰 종이 한 장을 뜨는 데 동시에 30명 이상이 동원된다. 장엄한 풍경은 중국만이 연출해낼 ‘문방 교향악’이었다. ‘홍성선지문화관’은 중국 종이의 역사와 화선지 제지의 온 과정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격동의 몸살을 앓으면서도 현재에만 안주하지 않고 역사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중국의 노력을 보았다. 문화적 전통을 방치하지 아니하고 바로 산업에 직결시켜내는 국가 단위의 힘과 지혜였다. 중요한 것은 종이가 있는 곳엔 반드시 붓과 먹, 벼루가 따랐다. 우리 문방세계에 어찌 그 네 가지만이 있으랴. 연적도 있고 서안(書案)도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그 도구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공동체 문화가 연출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 종이 한 가지만 키우는 게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문방류들을 산업으로 키워내는 정책들이 속 깊은 문화정책의 지원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한자, 중국문자로 단정하면 안 돼
동양식 문방문화는 바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 바탕에는 ‘한자’와 ‘붓글씨’ 쓰기가 있어 이 문화를 오랜 세월 떠받쳐 왔었다. 한자는 중국 문자라고 단정하면 안 된다. 세 나라 사이의 국경이 지금처럼 삼엄할 턱이 없고 모호하던 근대기 이전, 중국과 일본과 한국은 갑골문자에 근원을 둔 한자와 그 문자를 실용에서부터 문학 예술,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에 이르도록 더불어 사는 교호(交互)와 통섭(通涉)의 수단으로 선용해 왔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한국 문방문화의 쇠락에서 보듯 우리 글과 우리 글쓰기가 함께 몰락의 길을 가고 있음을 본다. 전자언어들이 이를 더욱 부채질한다. 동아시아 세 나라 가운데 문방문화의 가장 변두리에 있어 왔던 일본이 어쩌면 가장 제대로 된 한자의 실용과 문자적 가치를 세움에 따라 그들 나름의 고품격 문방문화를 이뤄내고 있음은 놀라운 아이러니다. 한자의 핵심에 있었고 문방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중국이 간체자(簡體字) 제정 이후에 많은 흔들림이 있었으나 이를 다시 되돌리려는 노력 여하에 따라 중국 문방문화 복원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우려가 한둘이 아니다. 아름답고 낯익은 문인화들에서 보듯 우리 민족은 얼마나 깊고 넓은 조선의 정체성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었던가.
이기웅 열화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