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박길성] 쉼표의 여유에 행복이 달려 있다

입력 2013-12-31 01:45


“국민 모두 잠시라도 흥분에 들뜨게 하고 사랑스런 정감이 담긴 10대 뉴스를 모으자”

2013년 마지막 날 아침이다. 김해영의 시 ‘쉼표’의 몇 구절을 옮겨 적는다.

“달려가는 눈은 놓치는 게 많다// 파아란 하늘에/ 구름의 굼시렁 흐름도 놓치고/ 갓 깨어난 아기 새의/ 후드득 솜털 터는 몸짓도 보지 못한다// 사랑하는 이의 눈가에/ 맺힌 이슬 받아줄 겨를 없이/ 아파하는 벗의 마음도 거들어주지 못하고/ 달려가는 제 발걸음이/ 어디에 닿는지도 모른다// 잠시 멈추어 쉼표를 찍는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점에서 이 시구만큼 우리네 마음을 격하게 감싸주는 표현이 어디 있을까 싶다. 많이 가졌든 덜 가졌든, 나이가 더 들었든 덜 들었든, 보수든 진보든 한 해의 노곤함을 내려놓고 싶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질주하는 한국사회의 일상에서 이 시구만큼 우리네 가슴을 억누르는 표현도 없을 듯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압축근대화의 이름으로, 압축성장의 동력으로 곁눈질 한 번 허락하지 않으며 그저 앞만 보고 질주한 한국인이기에 잠시 멈추어 쉼표를 찍어보는 일은 그야말로 로망일 것이다.

유례없는 압축의 노정에서 절차와 과정의 정당성은 무시되기 일쑤였고 내실보다는 외형이, 타협이나 절충보다는 독단이나 동원이, 심사숙고보다는 임기응변이 사회 운영의 지배적인 방식이 되곤 하였다. 때로는 대책 없는 모험주의가 성공의 신화로 각광받기까지 하였다.

압축의 관성은 한국적인 것을 모두 버리게끔 만든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강건하다. 조급증이 사회를 온통 감싸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5000달러였을 때나 2만 달러인 때나 과속과 쏠림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이러다보니 놓친 것이 너무 많다. 보듬어야 할 것을 놓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감사해야 하는 것도 놓쳤고, 사랑해야 하는 것도 놓쳤다. 배려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일에 무뎌졌다. 방향도 없이 그냥 분주하게만 사느라 지나쳐 버린 것이다.

한 해가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시대의 변화에 촉각을 세우는 언론사 선정 10대 뉴스가 그 하나일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10대 뉴스의 대부분은 정치를 중심으로 사건이나 사고로 가득하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보다는 빨리 기억에서 지웠으면 하는 뉴스가 대부분이다.

내년부터는 ‘아름다운 10대 뉴스’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한다. 우리 국민 모두가 잠시라도 흥분에 들뜨게 하고 기다려지게 만들고 사랑스러운 정감이 담긴 10대 뉴스를 모으는 일말이다. 잠시 멈추어 쉼표를 찍듯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에도 올 한 해 사랑스러운 일화가 적지 않게 있었다.

태평양 건너에서 전해지는 뱃심 좋은 류현진의 승전보, 전쟁터에서 생사를 같이한 부하들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사병 묘역에 묻힌 채명신 장군의 결기, 서울 중계동 등나무 근린공원 한켠에 들어선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개관, 어디 이것들뿐이겠는가.

올 한 해 가장 인상적이고 소중한 장면을 반추해보자. 나와 가족의 일부터 더듬어보자. 이웃이나 직장 혹은 동호회의 일도 좋다. 우리나라에 소중했던 장면을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소중한 것을 찾기 위해서라도 잠시 멈춰 쉼표를 찍어보는 것이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자신도 모르게 눈에 들어온다.

때가 때인 만큼 정부에 한마디 해야 할 듯싶다. 국민 행복으로 출발한 정부가 안타깝게도 분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놓친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잠시 멈춰 쉼표를 찍어보라고 주문한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기 바란다. 그 여유의 폭과 깊이에 국민의 행복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어느 언론사가 ‘아름다운 10대 뉴스’를 기획한다면 소재를 선정하는 일은 사명감을 갖고 기꺼이 함께 해보고 싶다. 잠시 멈춰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찾아내는 일은 정말 즐겁고 행복한 일이기에 널리 알려보련다.

박길성(고려대 교수,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