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의 여행] 에른스트 윙거 ‘대리석 절벽 위에서’(문학과지성사)
입력 2013-12-30 01:37
나치 정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작가 에른스트 윙거(1895∼1998)를 포섭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2차 대전 후엔 연합국이 탈나치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낸 설문지 작성을 그가 거부함으로써 잠시 작품 출판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런 모순적인 정체성으로 인해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그의 소설 ‘대리석 절벽 위에서’(1939·사진)는 나치의 전체주의 독재를 비판하는 작품이라고 해석되는 대표작이다.
“생명의 가장 깊은 내면에 현현했던 형식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몰락의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빠져들면 우리는 존재의 균형감각을 잃고 이리저리 비틀댄다. 무딘 기쁨에서 무딘 고통으로 빠져든다. 상실을 자각하는 일은 언제나 우리를 고무하며 미래와 과거를 더욱더 탐나는 것으로 비춰준다. 순간이 흘러가버리는 동안 우리는 외딴 시간 속에서, 아니면 먼 유토피아에서 움직인다.”(29쪽)
이 작품은 가상의 공간 ‘마리나’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와 오토형제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산림감독원장 무리의 횡포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엔 ‘나’라는 주어보다는 ‘우리’라는 주어가 더 자주 등장하는데, 잔인한 폭력을 자행하는 산림감독원장은 히틀러를 암시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작품이 출간되자 나치 정권 하에서 문화를 통제하던 이들은 즉시 윙거를 체포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낼 것을 건의했으나 히틀러가 직접 말렸다는 에피소드도 전한다.
하지만 산림감독원장은 굳이 히틀러로 한정한 것이 아니라 독재자의 한 전형이다. 윙거는 독재자를 폭력과 학살을 자행하고 절대 권력을 추구하는 윤리적 악인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혐오하고 파괴하는 자로 규정함으로서 미(美)에 대한 그의 관념을 드러낸다. 그가 단어를 다듬은 흔적이 농후한 매우 시적인 문체를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는 게 이러한 미학을 말해준다. 103살에 작고한 윙거가 신봉한 것은 나치도 연합국도 아닌 아름다운 문체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대산세계문학총서 121번째 작품으로 국내 초역. 노선정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