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장병원’ 급증-실태] 기업처럼 투자자 모아 수익 배당까지

입력 2013-12-30 01:49


의료법은 의료기관 설립 자격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조산사, 의료법인, 민법·특별법이 정한 비영리법인 등이 아니면 병원을 운영할 수 없다. 약국은 약사법에 따라 약사와 한약사만 개설할 수 있다. 하지만 제도 미비와 허술한 단속을 틈타 무자격 ‘사무장병원’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명의 빌려 병·의원 개설…온갖 탈·불법=사무장병원의 대표 유형은 의사 면허가 없는 사무장(실 소유주)이 고용한 의사나 의료법인, 비영리법인의 명의를 빌려 의료기관을 개설하고 탈·편법 진료를 하는 것이다. 사무장은 재력 있는 일반인, 의료기관 근무 경험자, 물리치료사, 치위생사 등 다양하다.

의료인이 아닌 전모(54)씨는 대구에 있는 자기 건물에 신장투석 의료시설을 갖춰놓고 2010년 1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40∼60대 의사 3명을 고용했다. 이 의사들 명의로 병원을 개설·운영하면서 총 21억9839만원의 건강보험급여비를 타냈다가 적발됐다.

비영리재단법인 박모 이사장은 지난해 초부터 올 8월까지 사무장 6명에게 1억9280만원을 받고 법인 명의를 빌려줬다. 사무장들은 이 명의로 의원·한의원·치과의원 등 7개 의료기관을 개설해 운영했다. 비영리법인이 이른바 ‘사무장병원 장사’를 한 것이다. 명의를 빌린 병원들은 교통사고 환자를 진료·처방 없이 입원시키거나 간호사에게 근육·링거 주사를 놓게 하는 등 무면허 의료행위도 일삼았다.

의료법인이 사무장병원 장사에 나서기도 한다. 사무장 A씨는 부산의 모 의료법인 대표 B씨 명의로 병원을 개설해 2011년 4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건보급여비 8억원을 부당하게 타냈다. B씨는 명의 대여 및 관리비 명목으로 A씨로부터 보증금 3000만원과 매달 300만원을 받았다.

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이 편법으로 의료기관을 개설해 운영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 6월 충북 충주아산의료생협이 개설한 모 의원은 자동차보험환자 임의입원(나이롱환자), 건보급여비 부당청구 등 온갖 불법 행위가 밝혀져 지난 9월 초 폐업 조치됐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에 따라 비의료인도 조합 설립에 필요한 법정 조합원과 출자액만 갖추면 의료기관을 설립할 수 있는 제도적 허점 때문에 사무장 병원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집계 결과 2009년부터 올 11월 말까지 적발된 사무장병원 608곳 중 408곳은 개인, 200곳은 법인이 운영하는 형태였다. 개인 사무장 병원은 2009년 6곳에서 올해 134곳으로 22배 급증했다. 법인 사무장 병원도 2009년 1곳에서 올해 71곳으로 크게 늘었다. 법인 형태는 비영리 사단법인 104곳, 의료생협 49곳, 의료법인 44곳, 사회복지법인 2곳, 종교법인 1곳 등이다.

◇잠만 자는 ‘숙박형’, 투자자 모집 ‘기업형’…날로 진화=지난 6월엔 잠만 자고 가는 ‘숙박형 사무장병원’이 적발됐다. 장모(52)씨 등 비의료인 3명은 수술이나 진료가 힘든 70∼80대 고령 의사들을 고용해 서울 유명 대학병원 인근에 숙박업소 형태의 사무장병원 6곳을 열었다. 대학병원에서 암 수술을 받고 통원 치료 중인 환자들에게 ‘암 수술 전후 항암치료·방사선케어 전문병원’이라고 홍보해 끌어들였다. 하지만 특별한 진료행위 없이 병실만 대여하고 입원료 명목으로 하루 4만∼12만원씩 받아 챙겼다. 허위 입·퇴원 확인서를 발급해 암 환자 1200여명이 총 101억원 민간보험금을 타도록 했다. 암 치료제 등을 처방한 것처럼 진료기록부를 꾸며 건보급여비 15억원도 부당 수령했다.

근래 검찰과 건보공단 공조로 밝혀진 ‘기업형 사무장병원’은 기업의 영리 행위를 그대로 답습했다. 기업 인수합병 전문가인 정모(50)씨는 2004년 자신이 한때 일했던 노인요양병원을 인수하고 건물주인 임대사업자 K씨와 함께 병원 사업을 확장하기로 모의했다. 정씨는 투자자를 모아 병원당 20억∼30억원 자금을 조성해 인테리어 공사와 의료기기 구입 등에 사용하고, K씨는 대출을 받아서 경매에 나온 건물을 인수한 뒤 정씨가 기획한 병원에 임대해줬다.

정씨는 기존 병원 의사나 구직 중인 의사에게 병원장직을 권유하며 지난해까지 의사들 명의로 병·의원 6개를 순차적으로 개설했다. 그리고 6개 병·의원 수익금을 해당 의료기관에 적립하지 않고 자금이 모자란 곳에 수시로 지원했고, 투자자에게는 배당 수익을 지급했다. 정씨가 2004년 7월부터 올해 7월까지 건보공단으로부터 챙긴 부당이익은 무려 1200억원에 달한다. 특히 정씨는 영리병원이 허용될 것에 대비해 병원 사업을 본격 확장할 계획도 세워둔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확인됐다.

공단 관계자는 “기존의 소규모 개인 사무장 병원이 최근 대규모 기업형으로 진화하는 추세이며 영리추구 수법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의사·한의사도 개업이 쉽지 않은 터라 명의 대여 대가와 병원장 자리까지 제안 받으면 솔깃할 수밖에 없다”면서 “활동이 어려운 고령 의사들이 사무장 꾐에 잘 빠진다”고 말했다. 건보공단이 지금까지 사무장병원에 고용된 의사 478명을 조사한 결과 54.6%가 60대 이상이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