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 피하려면 음주속도 줄이세요
입력 2013-12-30 01:33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지난 밤 회식에서의 기억이 흐릿하다. 언제, 어떻게 집에 들어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직장인 K씨의 호소다. 갖가지 모임의 회식이 줄 잇는 연말연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사연이다.
최근 들어 회식 때면 번번이 2차, 3차 술자리로 이어져 과음 후유증으로 소위 ‘블랙아웃’(blackout)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건국대병원 신경과 한설희 교수는 29일 “뇌 속 해마에 문제가 생겼는지 간밤의 술자리에서 자기가 한 말과 행동이 잘 기억나지 않는 일이 잦다며 이러다 정말 치매에 걸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불안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밝혔다.
블랙아웃은 우리가 흔히 술 마신 후 ‘필름이 끊겼다’고 말할 때의 단기기억상실을 가리키는 의학용어다. 보통 음주 직전에 습득한 정보나 그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유달리 음주 중에 발생한 일만큼은 잘 생각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간밤에 과음한 사람이 이튿날 아침 블랙아웃 현상을 반복해서 겪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혹시 이러다 치매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과연 잦은 블랙아웃은 조기 치매를 부르는 원인이 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블랙아웃은 치매, 특히 알코올성 치매와 큰 상관이 없다.
여의도성모병원 신경외과 나형균 교수는 “술에 취해 어떤 자극을 가해도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알코올성 치매와 달리 블랙아웃은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술을 단 시간에 빨리, 많이 마셨을 때 일어나는 일시적인 ‘기억 마비’ 현상과 같다. 따라서 힌트를 주면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반면 알코올성 치매에 의한 기억장애는 지속적인 알코올의 공격으로 인해 뇌 속에서 감정을 조절하는 전두엽과 기억을 임시로 저장해두는 역할을 하는 해마 조직이 손상되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한 번 잃은 기억은 결코 재생되는 법이 없다. 물론 이미 손상된 전두엽 및 해마 조직도 되살릴 수 없다.
알코올성 치매는 또한 대부분 알코올중독자들에게 일어나는 게 특징이다. 하지만 블랙아웃은 중독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흔히 발생한다. 이들은 대부분 전두엽도, 해마도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다.
블랙아웃이 나타나는 이유는 사실 음주량과 관련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특히 급격한 혈중 알코올 농도 상승이 가장 큰 원인이다. 술을 단시간에 급하게 많이 마셨을 때 주로 발생한다는 뜻이다. 즉 컴퓨터 작업을 하고 데이터 입력은 마쳤으나 저장하지 않고 급하게 컴퓨터를 꺼버린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결국 블랙아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술을 마시는 횟수와 양을 줄여야 한다. 특히 뇌가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아지는 것에 맞춰 대응할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주고, 간이 알코올의 독성을 분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간이 알코올을 분해하는 능력은 체중 60㎏ 성인 기준으로 시간당 7∼10g 수준이다. 소주(360㎖, 알코올 20% 내외) 1병을 마셨다면 알코올의 독성을 분해하는 데만 약 7∼10시간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대목동병원 신경과 최경규 교수는 “술에 관대한 우리의 잘못된 음주 문화가 음주 후 블랙아웃 발생을 조장한다”며 “이래저래 술자리가 많은 연말연시, 블랙아웃을 피하려면 술을 마시더라도 최대한 천천히, 가능한 한 2∼3잔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