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역사 치유의 현장 (6·끝)] 순교자의 딸, 화해 앞에 마주서다

입력 2013-12-30 01:48


“용서가 어디 쉬운가? 평생 걸쳐 이뤄지는 과정이더라”

두 아들을 잃고 오히려 거금의 감사헌금을 바쳤다. 아들 살해범을 품어 양아들로 삼은 그는 전쟁통에 나환자 곁을 지키다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1902∼1950) 목사의 일대기는 그가 순교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갈등과 대립, 반목이 판치는 우리 사회가 손 목사의 삶을 통해 드러난 사랑과 용서, 화해에 목말라하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뤄내는 일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님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두 오빠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손 목사의 맏딸 손동희(80·부산 대연중앙교회) 은퇴권사는 가족에게 닥친 그 모든 비극에 대해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했을까. 아버지가 살인범이었다는 것과 손 목사의 양자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까지, 이해하기 힘든 부친의 삶을 떠안고 살아야 했던 이도 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고 안재선씨의 아들 안경선(53·손양원 목사 생가복원 및 기념관건립 추진단 사무부총장) 목사는 자신 앞에 놓인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손동희 권사, 슬픔의 응어리 용서로 풀다

1948년 10월 19일은 소풍 가는 날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손동희는 큰오빠(손동인)가 건네준 과자와 용돈을 받아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난 그날, 손 권사는 큰오빠와 작은오빠(손동신)를 한꺼번에 잃었다. 열다섯살 여중생이 감내해야 했던 충격은 가혹했다. 총살당한 두 오빠의 장례식장에서 손동희는 또 한번 절망한다.

“아버지(손 목사), 오빠들을 죽인 살해범을 용서한다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그를 아들로 삼으면 나한테는 오빠가 되는데. 그럴 순 없잖아요, 아버지….”(손동희)

“동희야, 성경을 잘 읽어보거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쓰여 있지 않느냐. 아들로 삼아야 안 되겠나….”(손 목사)

아버지는 그를 용서했지만 손동희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항상 응어리 같은 게 맺혀 있었어요. 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는 슬픈 응어리요. ‘예수 잘 믿던 우리 가정에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일을 겪게 하시는가’ 그런 원망이 많았어요….”

‘용서’라는 마음이 그에게 넌지시 와 닿았을 때는 두 오빠가 죽은 지 10년쯤 지났을 때였을까. 부산 동일교회 부흥집회 때였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 손동희는 그 자리에서 회개기도를 했다.

“주님,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천국에 받아주십시오.”

안경선 목사, 세상에 화해의 손 내밀다

1979년 12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손 목사의 유복자인 손동길 목사가 “내가 네 작은아버지다”라고 소개하며 건넨 책 ‘사랑의 원자탄’은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안경선에게는 벗을 수 없는 굴레가 됐다.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을 죽인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니….’ ‘그런데 아버지는 왜 내게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라는 유언을 남기셨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몸에 병이 찾아왔다. 급성 폐렴과 합병증. 그는 병원을 찾지 않았다. 기도만으로 버텼다. ‘하나님이 부르신 종이라면 저를 낫게 해주세요. 신학교에 보내셨다면 분명한 부르심을 주세요.’ 2년 넘게 투병하면서 그는 결국 오른쪽 폐를 도려냈지만 병상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한 뒤 조용히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안재선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드러내지 않았다.

2004년 늦은 봄날, 목회자인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왔다.

“많은 사람이 손양원 목사의 양아들과 그 후손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더라.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네가 목사가 됐다는 건 손 목사님의 순교 열매가 아닐까….” 안 목사는 용기를 내 처음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본보 2004년 6월28일자 38면).

2013년 12월, 큰 고모와 조카의 만남

지난 21일 오전 11시 부산 대연동 대연중앙교회(박정원 목사) 정문 앞.

“우리 조카, 안 목사 어서와.” 교회 입구에 서 있던 손 권사는 안 목사를 보자마자 그의 손을 덥석 붙잡고 환한 미소로 반겼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큰고모와 조카의 만남은 어색하지 않았다.

최근 2∼3년간 두 사람은 자주 만나는 편이다. 손양원 목사 기념관 건립 및 생가복원 등 교계 안팎으로 손 목사에 대한 조명 작업이 활발해지면서다.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의 일원으로, 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용서’와 ‘화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와 닿을까.

안 목사는 3년 전 겪었던 경험담을 꺼냈다.

“언론을 통해 얼굴이 공개된 뒤 여수 애양원으로부터 수요예배 설교를 부탁받았어요. 애양원은 그때 처음 가보는 곳이었습니다. 막상 도착하자 복잡한 마음이 밀려들었어요. 내가 여기 왜 와 있는지부터 예수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당하셨던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설교시간이 되어 강단에 섰지만 10여분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어요. 결국 설교는 못하고 내려왔지만, 그때 성도들로부터 느껴졌던 긍휼과 위로의 마음 같은 것, 그 속에 용서와 화해도 함께 스며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손 권사는 안재선씨와의 마지막 만남을 회고했다.

“1979년 겨울쯤 내가 서울의 동생 집에 갔을 때였습니다. 재선 오빠가 찾아왔어요. 후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쯤이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내더라고요. ‘동희야, 나 이제 곧 하늘나라로 간다. 천국에 가면 네 두 오빠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할게.’ 그날 우리 둘이서 부둥켜안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가슴 속의 묵직한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때로는 그들의 간증이 또 다른 용서와 화해의 열매를 맺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안 목사 얘기다.

“작년 10월쯤이었어요. 손양원 목사 기념관 홍보행사 때였는데, 손 권사님과 제가 차례로 간증을 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50대 중반의 남자 성도가 다가와 내 손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헬기 조종사인 자기 아들이 산업재해로 추락해 죽었는데, 그동안 회사 사장을 원망해왔다고 하더라고요. 기독교인이지만 5년이 되도록 용서가 안 된다면서요. 그런데 그날 간증을 듣고 ‘다시 한번 용서해보겠다’며 용기를 내겠다고 얘기하더라고요.”

하지만 손 권사는 말한다. 용서와 화해, 치유가 때로는 일생의 긴 여정이 될 수 있음을.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여든 살이 넘은 나조차도 아직 그렇게 못하고 살아요. 인간이니까요. 그래서 매일 회개합니다. 하늘나라로 간 오빠에 대한 그리움은 지금도 남아있어요.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이뤄지긴 힘든 것 같아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저로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부산=글·사진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