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로드먼과 김정은, 세습된 특권
입력 2013-12-30 01:36
전직 NBA 프로농구 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지난 24일 평양을 찾아 며칠 동안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는 잘 알려진 대로 농구광이다. 10대 소년 시절을 스위스 국제학교에서 보낸 서양 유학생 출신인 그는 그 당시부터 방과 후 곧잘 농구시합을 했다곤 한다.
로드먼은 미국에서도 ‘광인(狂人)’ 취급을 받는 인사다. 동성연애자로 커밍아웃을 하는가 하면 여장차림에 짙은 화장을 즐기는 ‘크로스 드레서(Cross Dresser)’다. 온 몸 문신에 피어싱을 코·혓바닥에 달고 다니는 외양도 그렇다. 그는 현역 시절 악동으로 유명했다. 상대 팀 골게터를 자극하는 상습적 반칙왕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선수 시절 1990년대 세계 최고 스타였던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의 전담 마크맨으로 첫 유명세를 탔다.
외신에 나온 평양 사진들을 보면 로드먼은 ‘동토(凍土)왕국’에서도 여전히 범상치 않은 차림세로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다. 타락한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김 제1비서의 소신에 비춰 봐도 로드먼은 북한 주민들에게 내보일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김 제1비서 집권 이후 벌써 세 번이나 방북했다. 김 제1비서에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절대 권력이 있으니, 그런 그가 로드먼이 아니라 로드먼 할아버지를 불러들인들 누가 욕을 할 수 없는 모양새다. 지난 9월 방북 때는 로드먼과 함께 대동강에 자리 잡은 섬 별장에서 제트스키 승마 요트를 즐기며 즉석 칵테일파티까지 벌였다는 소식이다.
‘제왕의 당당함’이라고나 할까. 온갖 특권과 사치를 누리는 김 제1비서는 현대 사회에선 경멸 받아야 당연한 이 덕목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할리우드 영화의 열렬한 애찬자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브레이브하트’ ‘쉰들러 리스트’ ‘트로이’…. 김 위원장은 재작년 사망 전까지도 이런 블록버스터 미국산 영화들을 즐겼고, 젊은 시절에도 전용 영화관에서 각종 서양영화 필름들을 들여와 감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우리 영화인 부부인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 강제 납북사건 역시 두 사람이 연출·주연한 한국영화를 사랑했던 김 위원장이 만들어낸 공작이었다. 북한판 접대부인 ‘기쁨조’도 김 위원장에 의해 탄생한 기형적 변종 중 하나다.
안으로는 이처럼 누구도 못 누리는 호사스러운 취미를 즐기는 두 부자는 대중 앞에 서면 근엄한 표정에 촌스러울 정도로 수수한 인민복 차림으로 ‘무게’를 잡는다.
북한은 여전히 스스로를 사회주의 정체(政體)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인민’의 평등을 위해 목숨을 불살랐던 블라디미르 레닌과 마오쩌둥, 호찌민 등이 입었던 인민복을 정복으로 착용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태동기였던 19세기 초반 블루칼라 계급의 분노에서 시작됐다. 뼈 빠지게 일해도 굶주림조차 면하기 어려웠던 자신들에 비해 기름기 흐를 정도로 잘 먹고 잘 사는 특권층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다. 레닌의 러시아혁명도,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화도, 호찌민의 사회주의 베트남도 그렇게 건설됐다. 인민복에 깃든 사상은 그런 것이었다.
김 제1비서가 ‘어릿광대’ 로드먼을 불러들여 취미인 농구를 즐기는 사이, 북한 주민들 가슴속에는 분노가 싹트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들의 국가 이념이자 생활 지침인 사회주의를 탄생시켰던 그 분노 말이다. 김 제1비서가 매일 입고 다니는 그 인민복에 담긴 역사와 신념을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