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학생에 원하는 대로 써오라는 교사들… 못 믿을 ‘셀프 학생부’
입력 2013-12-28 01:34
서울 상계동의 고교 1학년 A양(16)은 얼마 전 담임교사로부터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기록할 내용이니 꼼꼼히 작성해오라”는 유인물(사진)을 받았다. 학기말 학생부 마감 시즌을 맞아 ‘특기 또는 흥미, 진로 희망’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등 교사가 학생부에 기록할 내용을 학생들에게 직접 작성해 오라고 한 것이다.
유인물에는 ‘올해 적극적으로 참여한 학교 행사’나 ‘우리 반을 위해 솔선수범해 봉사하거나 희생한 일’ 등과 함께 학생이 쓸 수 없는 ‘성적 분석’ 같은 항목까지 포함돼 있었다. A양은 “학생부를 직접 써 오라고 하는 것도 황당한데 성적 분석을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해 학원 선생님께 부탁했다”며 “이런 거 원래 담임선생님이 써주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대학 입시에서 학생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학생들에게 학생부 작성을 직접 맡기는 담임교사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2015학년도부터 수시모집을 중심으로 학생부를 더욱 중시하는 기조가 예고돼 있어 이처럼 학생이 작성하는 ‘셀프(self) 학생부’가 얼마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교사들은 “어차피 교사도 대입에 유리한 내용만 기록하는 관행이 있는데 이왕이면 학생과 학부모들이 원하는 내용을 기록해 주자는 취지”라고 설명한다. 교사의 수고도 덜면서 대입 당사자인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주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의견 참작을 위해 1년 전부터 학생들에게 직접 기록할 내용을 쓰도록 하고 있다”는 고교 교사 A씨(47)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요즘 학부모들의 불만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객관성을 확보해야 할 학생부가 당사자인 학생들 손에 맡겨지면서 과연 주요 입시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2 학부모 이정석(50)씨는 “우리 아이가 ‘아빠, 내가 그냥 대충 써 냈어’라고 하던데 담임교사가 역할을 방기하는 것 아닌가 싶어 화가 나더라”며 “심지어 일부 교사는 서울대 연·고대 등 명문대 수시모집에 합격한 우등생 2∼3명을 모아 학생부 작성 및 첨삭을 맡기기도 한다고 들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입학처 관계자는 “학생부가 이런 식으로 작성되고 있다면 당장 내년부터 신뢰도를 전혀 갖지 못하는 자료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학생부 위주 전형을 강조해도 대학들이 내심 수능이나 논술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 역시 이런 불신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