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토크] 야네샤족의 지혜

입력 2013-12-28 01:30


최근 바나나에 치명적인 TR4라는 곰팡이가 중동의 요르단과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발견됐다. 이 곰팡이는 지난 1980년대 대만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동남아, 인도, 호주 등지로 퍼져나가고 있다. 과학계에서는 TR4가 바나나의 최대 수출 지역인 중남미까지 번질 경우 바나나 멸종 사태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바나나 멸종 사태는 이미 한 번 겪은 바 있다. 1950년대의 주력 수출 품종이던 ‘그로 미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품종 역시 TR4와 비슷한 곰팡이 종류에 의해 사라졌다. 당시엔 지금의 주력 수출 품종인 ‘캐번디시’가 있었기에 빠른 대체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대체 품종도 없다.

바나나가 번번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는 까닭은 유전적 획일성 때문이다. 전 세계에는 다양한 야생종 바나나가 자라고 있으며, 그중에는 TR4에 저항력을 지닌 품종들도 있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바나나의 99%는 유성생식을 하지 못하게 개량된 캐번디시라는 품종이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야생 품종에 비해 캐번디시는 생산성이 좋고 너무 빨리 익지 않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유전적으로 뛰어난 품종일지라도 새로운 질병에 처할 경우 멸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 번의 곰팡이병에 의해 새삼 확인되고 있다.

1840년대의 아일랜드 감자 기근은 단일 품종 재배가 얼마나 큰 위험을 불러오는지 잘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 재배한 감자는 ‘럼퍼’라는 단일 품종으로, 전국의 모든 감자가 유전적으로 똑같았다. 그런데 이 품종은 감자마름병에 대한 내성이 없어 아일랜드 전역의 감자밭이 초토화됐다. 약 10년 동안 이어진 이 대기근으로 인해 800여만명의 아일랜드 인구 중 100만명이 굶어 죽고 300만명이 아메리카 등지로 이주했다.

그럼 왜 아일랜드에 감자를 전해준 남미 안데스 지역 원주민들은 그 같은 대기근을 겪지 않았던 걸까. 페루 아마존 상류 지역의 해발 수백m 되는 곳에서 지금도 자기들만의 전통생활 양식을 고수하고 있는 야네샤족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그 지역에 자생하는 코코나, 옥수수, 콩 등을 재배할 때 반드시 간작이나 윤작, 휴경 등의 전통 방식으로 다양한 서식처를 갖게 해 식물 다양성을 유지시킨다. 코코나의 경우 집안 뜰에 75종 이상, 화전에 125종 이상을 심어서 해충이나 병, 기상 등으로 인한 작물 파괴 가능성에 늘 대비해 현대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이성규 (과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