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날 살아간다면… 이성미 시집 ‘칠일이 지나고 오늘’

입력 2013-12-27 01:34


이성미(46)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칠일이 지나고 오늘’(문학과지성사)엔 태양력을 기준삼은 시간 체계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대를 살고 싶어 하는 시적 자아가 출몰한다. 일주일이 기본이 되는 세상에서 빠져나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오늘은 주름치마를 입고/ 시장 좌판을 펼치듯 하루를 펼친다.// 오늘은 뜨거운 시간, 서늘한 시간, 밝은 시간…/ 각자 다른 길이와 온도를 가진다.// (중략)// 오늘은 뒤섞이고, 오늘은 돌기가 있고,/ 마주 보다가 몸이 멍청해진다.”(‘칠일이 지나고 오늘’ 일부)

하나의 이야기가 일주일이란 단위 안에서 시작되고 종결되어야 하는 시간 체계 안에서 그 이야기는 미완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강박에 기인한, 강요당한 시작이고 강요당한 종결일 테니.

그래서 시인이 발명한 게 ‘칠일이 지나고 오늘’인 여덟 번째 날이다. 여기서 여덟 번째 날이라 함은 일주일 이후 잉여의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시간 체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덟 번째 날이라 하지 않고 ‘칠일이 지나고 오늘’인 것이다. ‘오늘’은 일주일의 질서에서 빠져나온 불규칙 동사들이 출몰한다. 그건 일주일의 어느 하루를 지칭하는 ‘요일’을 삭제한 채 다만 ‘오늘’이라는 시간대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초록뱀은 길어. 초록뱀의 꼬리도 길어. 꼬리 뒤에는 꼬리가 또 있지./ 초록뱀의 꼬리가 사라져도 초록뱀을 따라가지 않는 꼬리의 꼬리”(‘초록뱀의 꼬리가 사라지고 사흘 또는 일주일’)라든지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흩어지고.// 우리는 뜨거워지기 위해 더 뜨거워지기 위해, 찬물을 뿌려 시작점을 영도로 낮추지.”(‘일요일 오후 네 시’) 등은 일주일이라는 시간 체계의 꼬리를 따라가지 않는 자아와 더 뜨거워지기 위해 시작점을 영도로 낮추는 자아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대체 무엇을 위한 몸부림인가.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나에게는 형식이 있고, 너에게도. 그러니 우정에도 형식이 있다. 그렇다고 형식이 슬프지 않다는 건 아니다. 우리는 슬픔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니까, 슬픔을 그만둘 수는 없을 것이다.”(‘시인의 말’) 시인은 하나의 온전한 슬픔을 완성시키기도 전에 요일이 바뀌는 이 유치찬란한 시간 체계에 대해 저항하고픈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