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사랑하는 이의 입술 맛” 로맹 가리 만년의 연애소설
입력 2013-12-27 01:34
여자의 빛/로맹 가리/마음산책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1914∼1980·사진)의 장편 소설 ‘여자의 빛’(마음산책)은 사십 대 남녀가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벌이는 사랑 이야기다.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 한 남자가 택시 문을 열고 내리다가 낯선 여자와 부딪친다. “여자는 내 또래로 보였다. 차이가 난다 해도 기껏해야 몇 년일 듯했다. 젊음과 매력적인 이목구비로 윤곽만 잡힌 그 무엇이 흰머리로써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7쪽)
미셸과 리디아. 미셸은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아내가 있다. 그의 아내는 죽음에 굴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리디아는 반년 전 자동차 사고로 어린 딸을 잃었고 그 충격에 남편은 실어증에 걸렸다. 그녀는 딸의 죽음이 고통스러워 남편과 헤어지려 하지만, 헤어짐의 이유가 고통에 있는지, 식어버린 사랑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두 사람이 서로의 고통을 털어놓고, 미묘한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고, 사랑을 사유한다. 곧 있을 아내의 빈자리를 급조한 사랑으로 대체하려는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의 구애를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는 여자, 이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하룻밤이 더디게 흐른다.
“감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삶은 사랑하는 이의 입술 맛과 가장 가깝소. 내가 태어난 곳이 바로 거기요. 거기가 바로 내 존재의 출발점이오. (중략) 그러니까 당신이 거기에 있군. 여자의 빛이 있어. 다른 남자들은 그것 없이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125쪽)
로맹 가리가 죽기 3년 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던 그의 애정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조로운 연애 소설이 아니다. 로맹 가리는 아픈 사연을 지닌 남녀가 만나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간다는 고리타분한 설정을 애초에 배제하고,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을 맞닥뜨린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포개어 연애 소설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미셸은 딸이 죽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실어증에 걸린 남자 등 죽음에 굴복하는 사람들이 못마땅하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것, 불멸하는 것, 그러니까 사랑을 그토록 애타게 좇는다. 부부를 갈라놓는 죽음 그 무뢰한에 저항하기 위해 미셸은 사랑이 불멸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