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감수성·작가로서의 고민 오롯이… 버지니아 울프 자전적 에세이 ‘존재의 순간들’
입력 2013-12-27 01:34
20세기 영국의 모더니즘을 이끈 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가 1941년 3월 코트 주머니에 돌을 채워 넣고 영국의 우즈 강을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한 뒤 회고록 형식의 유고가 발견되었다. 유고는 버지니아의 언니 바네사 벨의 아들이자 당시 영국 서섹스 대학 역사학과 교수 쿠엔틴 벨에게 전기 집필을 위해 넘겨진 자료 속에 묻혀 있었다.
유고의 일부는 버지니아 전기에 인용됐지만 온전한 형태의 유고는 76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존재의 순간들’(도서출판 부글)은 그 번역본이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유고 가운데 1부는 버지니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조카, 즉 언니 바네사 벨의 딸 줄리안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난로의 온기가 우리를 따스하게 감싸주고 다리들과 치마들이 어른거리던 그 어슴푸레한 그림자 속에서 나는 너의 엄마를 처음 만났다. 우리 둘은 마치 광활한 대양을 항해하는 배들처럼 함께 돌아다녔으며, 그녀는 나에게 검은 고양이들이 꼬리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질문이 메아리를 일으키며 깊은 심연으로 떨어져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듯 잠시 침묵하다가 ‘없어’라고 대답했다.”(8쪽)
버지니아의 유년 시절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 경은 작가 겸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영국문단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어머니 줄리아 덕워스는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둘은 모두 재혼이었으며 결혼할 당시 레슬리 스티븐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고 줄리아 덕워스에게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이 있었다. 이후 이들의 재혼으로 탄생한 아이가 4명이었으니 한 지붕 밑에 세 가족이 살았던 셈이다. 버지니아가 자신의 어머니와 첫 남편 사이에 태어난 3명의 이복 남매에게 ‘타인들’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온갖 갈등을 겪으며 살았던 것이다.
2부는 언니 바네사의 독촉을 받고 39년 초부터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4개월 전까지 쓴 ‘과거의 스케치’이다. 이 글은 영국 예술비평가 로저 프라이의 전기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이따금씩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쓴 것이지만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에서 죽음을 예감하거나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를 건드리기도 한다. “나의 경우 지난주에 약간의 열이 있었다. 하루 온종일이 거의 비존재였다. 진정으로 훌륭한 소설가는 두 가지 종류의 존재를 어떻게든 전달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이 그런 능력이 있고, 트롤로프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새커리와 디킨스, 톨스토이도 그런 능력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존재와 비존재를 동시에 전달할 수 있었던 적이 아직 없었다.”(83쪽)
버지니아가 말하는 존재의 순간은 충격이나 깨달음, 계시 같은 것을 느끼는 찰나로, 개인 존재의 실체를 온전히 느끼는 순간을 말한다. 반면에 비존재의 순간은 개인이 존재의 실체와 유리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며, 먹고 마시고 자고 대화하는 등의 의식적인 생활의 대부분은 비존재에 속한다.
3부 ‘회고록 클럽 원고’는 버지니아 울프와 바네사 벨, 로저 프라이, E. M. 포스터 등 13명을 창립멤버로 해 1920년 3월에 조직된 문학 모임 ‘회고록 클럽’ 회원들 앞에서 낭독하기 위해 쓴 것이다. 약간의 바람만 일어도 금방 사라져버릴 것 같은 버지니아의 감수성과 생각이 담겨 있다. “혼란스런 감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서서 속치마를 벗고 기다란 흰 장갑을 벗고 흰색 비단 스타킹을 의자 뒤에 걸었다. 다른 많은 것들이 나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를 이루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다이아몬드와 백작부인, 성교, 플라톤의 대화, 미친 딕 팝햄, ‘세상의 빛’, 그런 것들이었다. 아, 침대에서 이렇게 쭉 뻗고 누워 잠을 자며 모든 것을 잊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267쪽)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