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만호 (3) 고교 시절 밀알학교·여명학교 등 교가 제작 참여
입력 2013-12-27 01:33
홍정길 목사님의 부친 홍순호 장로님은 나에게 함평 자광원 원가 작사를 부탁하셨다. 3절까지 작사해 널리 불리던 노래인 ‘부모님 은혜’ 곡에 붙였는데 300여명의 원생들이 즐겨 불렀다. 교회 어르신들의 장례식엔 한지 두루마리에 조사를 써 홍 장로님께 드리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알려져 서울 밀알학교와 여명학교 교가,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학교 교가에 노랫말을 붙이는 영광을 얻었다.
함평 중앙교회 박종철 목사님께서 주보를 만들어보자고 권해 여기에도 동참했다. 목사님이 매주 원고를 주시면 300여장의 주보를 만들어 등사하는 일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했다. 매년 학생회 회지를 맡아 만들기도 했다.
고교 3년 동안 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새벽기도였다. 박종철 목사님은 주일 새벽을 포함해 1년 365일 동안 창세기 1장부터 매일 1장씩 성경 공부를 하셨다. 얼마나 재밌고 은혜스러웠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학교 공부보다 훨씬 열심히 성경 공부에 매진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시편 공부는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 새벽기도에 함께했던 친구 중 17명이 신학대에 가서 목사와 선교사가 됐다.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시험 때 갑작스럽게 열병이 나서 응시 기회를 놓쳤다. “임형,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숭실대에서 후기 모집을 하고 있으니 한번 해보는 게 어때요.” 숭실대 철학과에 먼저 다니고 있던 홍 목사님이 시험을 한번 쳐보라고 권유했다. 동급생보다 한 해 늦은 1961년 숭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홍 목사님은 독서광이었다. 교정에서 만날 때마다 홍 목사님은 항상 대학노트를 뒷주머니에 끼고 옆구리에는 늘 책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문학청년으로서 문학, 특히 시에 관심이 많았다. 신입생 때 시인 김현승 교수님을 만났다. 김 교수님은 1학년 대학국어를 담당하셨다. 어느 날 강의를 마치신 김 교수님은 나를 지목하시더니 다음 수업시간까지 시 두 편을 써서 자신의 연구실로 가져오라고 하셨다.
시 대가이신 교수님 말씀에 매우 긴장해 1주일 동안 밤을 새며 두 편의 시를 써서 다음 국어시간 후에 교수님 방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은 아무 말씀 없이 시를 보시더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그리고 불호령 같은 말이 떨어졌다. “이것도 시라고 써 왔는가.” 그리고 방을 나가버리셨다.
나는 매우 당황하고 창피해 시를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관악산만 한참 바라보다 나와 버렸다. 다음 강의 시간에는 부끄러워서 교수님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 한달 여가 지난 어느 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타박을 하셨던 교수님이 그 시 한 편을 학보에 실어 주셨던 것이다. 그리곤 내게 시를 많이 읽으면서 시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셨다. 그 이후 내게 가끔 책도 소개해 주시고 나의 습작시를 지도해 주시곤 했다.
당시엔 1940년부터 42년생까지 군 면제를 받게 돼 있었다. 당연히 나도 면제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 남아로 태어났으니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1964년 2월 함평군 입영자 30명이 버스를 전세내 목포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장도 없는 나는 버스에 몸부터 실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